[남기고]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 42. 클럽 ‘라이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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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필자의 세 아들은 중·고교 시절부터 록밴드 활동을 했다. 각자 그룹 활동을 하고 있지만 특별한 날이면 함께 연주를 한다.

아이들이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길 바라는 아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고정 수입이 있는 직장인이 되면 가정을 안정적으로 꾸려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인에겐 그런 일을 상상하기 어렵다. 언제 돈을 벌지 모르고,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내가 5년간 활동정지 처분을 받는 바람에 그 전에 쌓아온 명성과 돈마저 물거품이 되는 걸 지켜본 아내가 아니던가. 아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게도 생겼다. 쌀독이 바닥을 드러내게 생겼는데 음악은 무슨 빌어먹을 음악이냐는 것이다. 아내의 마음속엔 아직도 그 여운과 미련이 남아 있는 듯하다. 어쩔 수 없으니 따르는 것뿐….

음악인이 되는 것은 분명 모험이다. 그러나 진정한 음악인이라면 안정적인 생활에 대한 미련은 버려야 한다. 물론 굶더라도 음악은 해야겠다는 사람들이 일반인의 시선으로는 가장 불행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걸 잊을 정도로 음악에 열중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행복이 어디 있겠는가. 글쎄…. 우리 아이들이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직업 음악인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청소년기에 음악에 몰두하는 건 바람직한 일이다. 음악을 하면 아이들이 나쁜 길로 빠지는 걸 막을 수 있다. 오로지 음악에만 미치니까. 한창 자라는 청소년기엔 폭력성을 드러내고픈 욕망에 사로잡힌다. 록음악은 그 안에 거칠고 폭력적인 속성을 담고 있다. 록은 힘과 스피드를 요구하는 음악이다. 아이들은 그 연주의 한계에 도전하면서 젊음을 발산하고 폭력성도 해소한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평화롭게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가 음악이다. 나는 단 한 번도 우리 아이들 때문에 골치가 아픈 적이 없다. 모든 게 음악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난 한 술 더 떠 1980년대 중반, 이태원에 라이브 클럽을 열었다. 우리 아들들을 포함해 록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마음껏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라이브 문화가 없었다. 대중음악은 주로 방송으로만 전파되곤 했다. 방송으론 한참 부족하다. 진정한 라이브 음악을 듣는 문화가 형성돼야 음악인에게도, 음악의 발전에도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클럽 이름을 아예 '라이브'라고 지었다. '라이브'란 용어가 그때 퍼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돈을 댄 동업자가 항의했다.

"아니 대체 라이브가 뭐야?"

라이브의 개념을 알리려는 욕심에 그를 설득했다. 다행히 좋은 음악인들이 그 뜻에 동조했다.

최고의 연주자들은 대부분 클럽 '라이브'에 출연했다. 1인당 교통비조로 5000원씩만 받고도 기꺼이 무대에 올랐다. 객석은 미어터졌다.

클럽이 번창하자 투자한 동업자가 마음을 바꿔먹었다. 나를 쫓아낸 것이다. 장사가 될 듯하니, 그 이득을 혼자 차지할 욕심이 난 모양이었다.

"잘 먹고 잘 살아라"

깨끗하게 손을 털었다. 내가 손을 뗀 지 한 달 만에 클럽은 문을 닫았다. 거기서 또 한 가지를 배웠다.

'동업은 안되는구나…'.

신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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