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빈교실에 어린이집’ 놓고 교육부·복지부 밥그릇 싸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2면

경기 안산 단원구에 위치한 한 어린이집 교실의 모습. 초등학교의 남는 교실을 국공립 어린이집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영유아보육법 개정안을 두고 교육계와 보건복지부가 갈등하고 있다. [중앙포토]

경기 안산 단원구에 위치한 한 어린이집 교실의 모습. 초등학교의 남는 교실을 국공립 어린이집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영유아보육법 개정안을 두고 교육계와 보건복지부가 갈등하고 있다. [중앙포토]

초등학교에서 쓰지 않는 교실을 국공립 어린이집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영유아보육법 개정안이 무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지난달 24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를 통과했지만 지난달 30일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에서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법사위서 제동, 법 개정안 무산 위기 #문재인 정부 “국공립 확충” 목표 #교육부는 “유치원부터 증설” #복지부는 “어린이집 먼저” 주장 #전문가 “관리권 통합부터 해야”

법사위 야당 의원들은 “교육계와 충분한 협의를 거치지 않았다”며 이 법안을 법사위 법안심사소위로 내려보냈다. 소위에서 개정안을 수정해 재심사할 수 있지만 교원단체와 전국 시도교육감 등 교육계가 강력 반발하고 있어 통과가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이 법안은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1월 대표 발의했다. 어린이집의 설립, 운영 근거 등을 담은 영유아보육법에 ‘초등학교 유휴교실을 국공립 어린이집으로 용도 변경할 수 있다’는 조항을 신설한다는 내용이다. 국공립 어린이집은 학부모들에게 인기가 높지만 부지 매입과 건축 비용 문제로 확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공립 어린이집을 늘리기 위한 방안으로 초등학교의 빈 교실을 사용하자는 것이 법안의 취지다.

하지만 이 법안이 지난달 24일 보건복지위를 통과하자 교육계는 일제히 반발하고 나섰다. 법상 교육기관인 학교에 보육시설인 어린이집을 들일 수 없다는 이유다.

지난 11월 30일, 전북 전주시 전북교육청에서 열린 전국 시·도교육감협의회 총회에 참석한 전국 시·도교육감의 모습. 이들은 이 날 성명을 통해 영유아보육법 개정안에 대해 반대했다. [뉴스1]

지난 11월 30일, 전북 전주시 전북교육청에서 열린 전국 시·도교육감협의회 총회에 참석한 전국 시·도교육감의 모습. 이들은 이 날 성명을 통해 영유아보육법 개정안에 대해 반대했다. [뉴스1]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는 성명을 내고 “학교는 교육부와 교육감이, 어린이집은 복지부와 지방자치단체장이 관장하는데, 국회 보건복지위가 교육부나 교육청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법률을 가결한 것에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고 밝혔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한국교총)도 “영유아와 함께 생활하는 초등학생 수업권 침해, 안전관리 문제 등이 우려된다”며 “유휴교실이 생기면 음악실, 미술실, 실과실 등 초등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한 시설 확충을 우선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공립유치원교원연합회 또한 “유휴교실이 있다면 우선 ‘하늘의 별 따기’라는 국공립 유치원부터 증설해야 한다”라고 반발했다.

정부 부처 간에도 의견이 엇갈리지만 갈등을 조율할 콘트롤 타워는 없었다. 교육부 관계자는 "법안이 처음 발의될 때 교육부에서 교육 현장 우려를 담은 의견을 낸 것이 전부다. 국회에 유휴교실 개수를 알려주는 정도를 제외하면 부처간 이 문제를 논의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어린이집을 관장하는 복지부는 “지방의 경우 신축 비용 부담으로 국공립 어린이집 확충에 소극적인데, 유휴교실을 활용하면 애로사항이 해소될 것으로 기대된다”며 개정안을 지지했다. 하지만 유치원을 관장하는 교육부는 “초등학교와 어린이집 관리 감독 주체가 다르고 병설유치원과의 중복 경쟁 문제 등으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며 반대하고 있다.

교육부와 복지부는 저마다 '국공립 확충'을 목표로 내걸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 따르면, 교육부는 현재 25% 수준인 국공립 유치원 취원률을 2022년까지 40%로 높일 계획이다. 복지부 또한 12%에 머물고 있는 국공립 어린이집 이용률을 40%로 높인다는 계획을 세웠다. 교육부와 복지부가 각각 "유치원 먼저"와 "어린이집 먼저"를 주장하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지금처럼 교육과 보육이 별도 부처에서 관리되는 체계에서는 갈등을 해결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때문에 ‘유보통합’(유아교육과 보육의 통합)이 우선돼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이정욱 덕성여대 유아교육과 교수는 “근본적으로 교육부와 복지부의 유보통합이 이뤄져야 풀릴 문제다. 아이들이 반으로 쪼개져있는 것도 아닌데, 교육부와 복지부가 각각 영유아 정책을 만드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유보통합은 20년간 해묵은 과제다. 1997년 김영삼 정부 시절, 유아교육법 개정 과정에서 처음 공론화됐지만 결론이 나지않았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이해관계가 갈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유치원 교사는 전문대나 4년제대에서 교사 자격을 취득하지만, 어린이집 보육교사는 대학에 가지 않아도 관련 과목을 이수해 자격을 딸 수 있다. 급여도 대체로 유치원 교사가 월 200만원 이상인데 반해 어린이집 교사는 200만원에 미치지 못한다. 또 유치원은 반드시 정부 평가를 받지만 어린이집은 자율적으로 평가에 참여하고, 시설 기준도 다르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만 3~5세 공통 교육과정인 ‘누리과정’을 만들어 유치원과 어린이집이 같은 과정을 가르치게 하고, 정부 지원을 약속했다. 하지만 이후 어린이집 재정 지원을 누가 할 것인가를 두고 정부와 교육청·지자체 간에 극심한 갈등을 빚으면서 유보통합 필요성이 다시 대두됐다.

박근혜 정부는 2014년 국무조정실 산하에 ‘영유아교육보육 통합추진단’(유보통합추진단)을 만들면서 통합을 추진했지만 실패했다. 추진단은 아직까지도 국무조정실에 존속하고 있지만 사실상 ‘개점 폐업’ 상태다. 교육부 관계자는 “현 정부는 유보통합을 국가교육위원회에서 논의한다는 방침이라 추진단이 내년에도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가 유보통합에 적극적으로 나설지 여부는 미지수다. 유보통합이 국정과제에도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사 자질 향상과 처우개선, 자격 체계 개편 등을 통해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격차를 완화한다는 내용이 전부다. 사실상 유치원과 어린이집으로 분리된 영유아 교육·보육 체계를 유지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전문가들은 지난 정부에 이어 유보통합 논의를 계속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정욱 덕성여대 교수는 “지난 정부에서 통합을 추진하다 멈춰졌다. 정권이 바뀐다고 없던 일이 되어서는 안되고 교사와 교육, 재원 등 통합 논의를 계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원영 중앙대 유아교육과 명예교수는 “0~2세 사이에 뇌 발달이 엄청나게 이뤄진다. 끼워맞추기 식이 아니라 유보통합을 통해 영유아 교육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남윤서·이태윤 기자 nam.yoonseo1@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