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의 세월 운율에 실어 자신의 앞길 넌지시 암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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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나는 그에게 한마디만 하고 싶다'(인동, 1999). 김대중 전 대통령의 시조가 실린 시집이다. 대통령과 국민의 정부에게 보내는 현역시인들의 메시지가 담긴 이 시집에는 김대중의 시조 두 편이 실려 있다. 인생역정을 압축한 결코 짧지 않은 '옥중 단시'와 '인제 가면'이 그것이다.

당쟁과 사화의 소용돌이에 치여 마음은 구중궁궐에 있으나 몸은 위리안치(圍籬安置)되어 북천을 향해 눈물짓던 옛 선비들이 있었다. 고난 속에서 서책을 탐독하고 시문을 짓던 그들처럼 김대중도 고난의 시대를 보냈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던 김대중은 감형을 받아 청주교도소에서 무기수 생활을 했다. 그때 마음을 달래고 다지고자 '옥중 단시' 12수를 지었다. 그가 탐독했다는 만권서(萬卷書) 중에 시조집 몇 권 있었으리라.

취임 1주년인 99년 '국민과의 대화'에서 대통령 자격으로 직접 낭독한 '옥중 단시'는 문학적으로도 빼어나다. 시조 형식을 완벽하게 구사했고, 시상 전개도 노련하다. 첫 수를 보자.'면회실 마루 위에 세 자식이 큰절하며 / 새해와 생일하례 보는 이 애끓는다. / 아내여 서러워 마라 이 자식들이 있잖소.' 수감 중에 세배 온 가족들을 유리창 너머 바라만 보아야 했던 설움이 구절마다 잘 우러난다.

셋째 수에선 선비들의 옛 시조를 탐독한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난다. '추야장 긴긴 밤에 감방 안에 홀로 누워 / 나라일 생각하며 전전반측 잠 못 잘 때 / 명월은 만건곤하나 내 마음은 어둡다'고 노래했다. 군데군데 낯익은 표현이 자신의 심정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그가 자기 암시의 시조를 썼고, 그게 현실이 됐다는 점이다. '인제 가면 언제 올까 기약 없는 길이지만 / 반드시 돌아오리 새벽처럼 돌아오리 / 돌아와 종을 치리라 자유종을 치리라.' 82년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돼 미국 망명길에 오르기 직전에 쓴 '인제 가면' 3수 중 둘째 수다. 그랬다. 돌아와 '자유종을 치리라'는 예언처럼 그는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와 마침내 98년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일본에선 일왕이 새해 덕담을 일본 전통시인 하이쿠(俳句)로 발표한다. 이웃나라의 좋은 풍습은 따라도 흉이 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도 이제 대통령의 길고 지루한 신년사 가운데, 국민 가슴에 꼭 새기고 싶은 말은 시조 한 수쯤으로 쨍! 하게 압축해 낭독하는 여유와 낭만을 갖고 싶다.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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