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주의소곤소곤연예가] 고혜성 "백수여, 시간 잘 쓰면 안 되겠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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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백수'란 단어를 듣자마자 파란색 '츄리닝'과 부스스한 머리, 그리고 휴대전화가 떠오른다면 당신도 분명 KBS 개그콘서트 인기코너 '현대생활백수'에 중독된 것이다. 요즘 '제8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개그맨 박명수의 호통개그와는 반대로,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마법 같은 주문, 부탁 개그 '안 되겠니?'를 외치는 대한민국 대표백수 고혜성. 그를 실제로 만났더니 화면에서 막 뛰쳐나온 것처럼 푸르스름한 '츄리닝'(트레이닝복) 차림일 줄이야.

"소품이 아니라 원래 제 옷이에요. 개그도 리얼리티가 중요하거든요. 방송에서 휴대용 가스레인지나 찌그러진 냄비도 다 제가 집에서 쓰고 있는 것들이고요. 특히, 실감나는 연기를 위해 녹화 전날부터 머리도 안 감죠."

덕분에 데뷔 3개월차 파릇파릇한 신인에게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기록, 14번의 녹화 동안 단 한 번의 NG도 없었다. 바로 오랜 백수 시절의 살아있는 경험이 최고의 비법이었던 것. 하지만 실제의 그는 여느 백수와는 사뭇 달랐다는데.

"백수에게 무작정 시간만 죽인다고 답이 나오진 않거든요. 저는 일단 남아도는 시간에 영어를 배웠어요. 처음 1년 동안은 매일 10분씩 영어로 전화통화하며 공부를 했는데 기초가 없으니까 한국말만 하게 되더라고요. 의욕은 있는데 학원 갈 시간도, 돈도 없고 해서 3년째 회화테이프라도 열심히 듣고 있죠. 남들보다 늦은 만큼."

학창시절 대학 진학은 고사하고, 당장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했던 그는 상업고 1학년 때 3년치 자격증을 모두 따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 후 아쉬움을 접고 무작정 돈 되는 일이라면 새벽 신문배달부터 한밤중 야식배달까지 안 해 본 일이 없는 그는 5년 전 3층 높이 사다리에서 간판 달다가 떨어져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병원에서 장애 판정을 받고 좌절하다가 평소하고 싶었던 레크리에이션 강사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일하는 날이 한 달에 3~4일밖에 없어 나머지는 백수처럼 지냈는데 무언가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가족들과 친구들이 말리는데도 아픈 다리를 무릅쓰고 춤을 배웠죠."

없는 살림에 돈까지 빌려 개인교습을 받을 정도로 춤에 흠뻑 빠졌던 그는 1년 넘게 배운 살사와 복고댄스로 학원까지 차렸다. 물론 얼마 못 가서 홀딱 망했지만. 그런데 의사도 포기했던 그의 절룩이던 다리가 기적처럼 나았다. "대한민국에 안 되는 게 어딨어요? 정말 낫는다 낫는다 긍정적인 자기최면을 걸었더니 진짜 낫더라고요. 무엇보다 하고 싶은 춤을 추니까 아픈 것도 몰랐던 거죠. 그리고 다른 백수들 만화 볼 때 저는 레크리에이션의 현란한 멘트를 위해 한 달에 15권 이상 책을 읽었더니 업계에서도 인정받고, 제자도 10명이나 생겼어요."

부자들이 충고하길 진짜 부자가 되기 위한 노하우는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돈을 어떻게 잘 쓰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고 한다. 돈보다 시간이 더 넉넉한 백수들을 위해 고혜성은 이렇게 충고한다.

"형이 하는 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 남아도는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성공이, 인생이 달려 있어. 그래서 말인데 진짜 하고 싶은 것 하면 안되겠니~."

이현주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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