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는 장례식' 뿌리 내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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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수 전 고려대 농대 학장의 뼛가루가 뿌려진 참나무의 모습. 이 나무에는 '김장수 할아버지 나무'라는 푯말이 걸려 있다. 김 전 학장의 수목장은 2004년 9월 국내 처음으로 열렸다. [산림청 제공]

지난해 10월 운동회 도중 뇌출혈로 사망한 김철민(당시 14세.가명)군. 경북 영천시 팔공산 자락에는 김군의 명패가 걸린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화장 뒤 김군의 뼛가루(골분.骨粉)를 이 나무 아래 뿌려 장례를 치른 것이다. 가족은 매달 말 산을 찾아 나무를 어루만지며 김군을 추모한다. 김군의 아버지(43)는 "자연으로 돌려보낸 아들이 나무로 다시 태어난 듯해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

뼛가루를 자연에 뿌려 장례를 치르는 '에코다잉(eco-dying)'이 새로운 장례문화로 정착되고 있다. 포화 상태에 이른 묘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산림훼손 등 환경 문제도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전국의 묘지 면적은 998㎢(약 3억 평). 서울의 1.6배에 해당한다. 복지부 관계자는 "해마다 여의도만 한 땅(약 68만 평)이 묘지로 없어지고 있어 2020년께 묘지대란 사태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처럼 매장할 땅이 부족해지자 화장한 뼛가루를 산이나 바다 등에 뿌리는 산골(散骨) 형태의 에코다잉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복지부 등에 따르면 화장률은 2002년 38.5%에서 2004년 48.6%로 증가했으며, 같은 기간 화장 뒤 산골을 하는 비율은 9.4%에서 22.3%로 급증했다.

◆ 바다.꽃.나무가 '무덤'=골분을 바다에 뿌리는 '해양장(海洋葬)'도 늘어나는 추세다. 바다 위 부표(항로를 나타내기 위해 바다 위에 띄운 표지물) 인근에 뼛가루를 뿌리고, 뒤에 부표를 찾아 제사를 지낸다. 1999년 문을 연 인천 연안부두의 '바다 장례식장'의 경우 개장 첫해 132건에서 지난해 943건으로 일곱 배 이상 이용이 늘었다.

꽃동산 등에 뼛가루를 뿌리는 '정원장(庭園葬)'도 인기다. 서울시는 2003년부터 경기도 파주에 '추모의 숲'을 운영하고 있다. 골분을 무궁화.국화 등이 피어 있는 동산에 흙을 섞어 뿌리고 합동제단에서 추모하는 방식이다. 서울시에 따르면 이용 건수가 2003년 614건에서 2005년 1768건으로 꾸준히 늘었다.

시신을 화장해 뼛가루를 나무 밑에 뿌리거나 묻는 수목장은 크게 확산되고 있다. 수목장은 2004년 김장수 고려대 전 농대학장의 장례 때 처음 국내에 알려졌다. 스위스.독일.영국 등에서는 90년대 후반부터 활성화됐다. 지난해 한국산림정책연구회가 조사한 결과 절반 이상(52.4%)의 국민이 수목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현재 국내에선 종교기관 등을 중심으로 수목장이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 초 수목장림을 개장한 경북 영천 은해사의 경우 1년 동안 100여건의 수목장을 치렀다. 사찰 인근 1만여 평의 소나무 숲에 뼛가루를 뿌려 장례를 치른 뒤 나무에 명패를 걸어주는 방식이다. 사찰 관계자는 "월평균 예약 건수가 20건을 넘는다"고 말했다.

지방자치단체도 수목장림 조성에 적극적이다. 서울시는 경기도 용미리 군부대 반환지에 3만 평 규모의 수목장림을 조성키로 했다. 경기도는 15만 평 규모의 수목장림을 2008년 상반기까지 만들 예정이다.

김성훈 상지대 총장 등 각계 인사 500여 명은 14일 '수목장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발족했다.

◆ 관련 법 제정 시급=에코다잉형 장례가 늘고있지만 정부의 지원이나 규제는 전무한 실정이다. 관련 법이 없는 것이다. 현행 장사 등에 관한 법률(장사법)에는 매장에 관한 규정만 있을 뿐이다. 일부 지방에서는 이를 악용해 나무 한 그루에 수백만원씩 받는 사설 수목장도 등장했다고 한다. 산림청은 최근 국공유림을 이용한 수목장림 사업을 계획했으나 관련 법률이 없어 추진을 보류했다.

정강현 기자, 강은나래 인턴기자(연세대 4학년)

◆ 에코다잉이란=시신을 화장한 뒤 남은 뼛가루를 산.바다 등에 뿌려 자연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친환경적인 장례를 뜻한다. 수목장.해양장.정원장이 대표적인 에코다잉형 장례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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