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영화] 사대부는 어디 사람이 아니라더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10면

주연: 한석규.이범수.김민정
장르: 코미디.멜로
홈페이지: (www.ummm2006.co.kr)

20자 평: 꿈은 재미로되, 현실은 아름다워도 지루하구나.

요즘 사극을 보는 일은 즐겁다. 연간 한두 편에 불과한 제작 편수임에도 매번 새로운 재미를 보여주며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음란서생'(23일 개봉) 역시 이런 계보를 이으려는 작품이다. 미술과 의상의 화려한 색감은 더 말할 나위가 없고, 조선시대 명문장가로 이름 날리던 사대부가 묘한 창작욕에서 음란소설을 집필해 저잣거리의 인기작가로 부상한다는 줄거리 역시 전례 없다. 영화는 이를 두 겹으로 전개한다.

음란소설의 독자와 창작가가 추구하는 일종의 판타지가 한 겹이라면, 그 소설 바깥세계의 실제 사랑 얘기가 또 한 겹이다.

영화가 짐짓 뜸을 들이며 풀어놓는 판타지는 성을 소재로 한 코미디로서 재미가 색다르다. 소설의 내용임을 빌려 희한한 체위를 공공연히 스크린에 펼쳐 보이면서도 크게 낯 뜨겁지 않다. 수염 덥수룩한 음란소설 제작진끼리의 시연회나 남.남 모델끼리의 시뮬레이션 같은 아기자기한 연출 덕분이다. 자연히 웃음의 맛은 배가된다. 이 판타지의 주체는 사대부 윤서(한석규)다. 주먹다짐이 영 시원찮은 소심한 유생 윤서는 자신의 소설 줄거리를 설명하는 장면에선 왕비와의 밀애을 주도하는 적극적인 남자로 묘사된다. 그야말로 눈으로 봐야 웃기는 코미디다. 영화는 이 소설에 열광하는 여염집 아낙네들의 반응을 요즘 네티즌의 행동에 빗대 웃음을 증폭시킨다.

정작 이 영화의 관람등급(18세 이상)에 걸맞은 야한 분위기는 현실 장면에서 나온다. 왕비 정빈(김민정)은 자신을 이모저모 도와준 윤서에게 궁궐 밖 밀회를 청할 정도로 적극적인 구애공세를 보낸다. 정빈과의 연정을 음란소설 집필의 영감으로 활용하던 윤서는 바로 그 소설을 위해 대담한 짓을 저지른다. 실물을 봐야 제대로 그릴 수 있다는 삽화가이자 의금부 도사 광헌(이범수) 때문에 왕비와 사랑의 실연에 나서는 것이다. 이는 나중에 윤서가 의금부에서 가혹한 고문을 당하는 빌미가 된다.

여기서 그쳤더라면 '재미있는 섹스 코미디 사극'이라고 영화를 소개하기 쉬웠겠지만 소설의 바깥에 있는 극중 현실은 한결 중층적이다. 정빈과 윤서뿐 아니라 정빈을 한결같이 지켜온 조 내관(김뢰하), 정빈의 진짜 배우자인 왕(안내상)의 감정이 중첩되면서 영화는 판타지와 코미디의 색채가 탈색되고 현실의 사랑 대결로 전환한다.

문제는 이 판타지 코미디와 현실적 멜로라는 두 겹 옷감 사이의 바느질이 기대만큼 빼어나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사태를 다 알면서도 방관하는 듯하던 왕이 벼락같은 호통으로 각자의 사랑을 증명하게 하려는 대목은 전반부의 판타지를 갑작스레 신파로 만들어 버린다. 영화는 '진맛'이라는 자체 신조어를 통해 '꿈꾸는 것 같은 것, 꿈에서라도 맛보고 싶은 것'이라고 판타지의 힘을 역설해 왔건만, 그 '진맛'과 극중 현실의 접점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다. 고증을 떠나 이전의 사극에서 보기 힘든 왕비의 궁 밖 연애라는 설정 역시 서양 궁중극을 보는 듯한 이물감을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배우들의 연기 조화는 이 영화의 또다른 미덕이다.

한동안 제 역할 아닌 자리에 부유하는 듯싶던 한석규는 비로소 한석규다운 맛을 보여주고, 튀지 않고 진중한 이범수, 정중동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김뢰하가 고루 호연을 보여준다.

굳이 비교하자면 스크린에서 김민정의 매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왕의 남자'의 장녹수보다 훨씬 크고, 음란소설 판매책 역할의 오달수는 '왕의 남자'의 육갑이 만큼 긴장을 웃음으로 바꿔낸다.

이후남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