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고비마다 불거지는 외교적 대안, ‘전략적 모호성’의 아쉬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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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 모호성을 취하면 될 것을…”

현 정부 들어 외교가에 자주 듣는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동남아시아 순방 막바지에 봉인한줄 알았던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체계 이슈가 다시 거론되면서 10월 31일 ‘한ㆍ중 관계 개선 관련 양국 협의 결과’를 두고 이런 말이 다시 나왔다.

문재인 대통령 순방 막바지 다시 거론된 한중 '사드' 입장 차 #3불, 인도ㆍ태평양 등 현 정부 외교 고비 때마다 '모호성' 실패

APEC, 아세안 정상회담 등 동남아시아를 찾은 문재인 대통령이 14일 오후 필리핀 젠호텔 중앙기자실을 방문해 순방 성과에대해 브리핑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APEC, 아세안 정상회담 등 동남아시아를 찾은 문재인 대통령이 14일 오후 필리핀 젠호텔 중앙기자실을 방문해 순방 성과에대해 브리핑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중국 외교부 고위 관계자는 14일 “지난 10월 31일 한·중 외교부가 발표한 사드 합의문은 문제 해결의 첫 단계이며 최종 단계는 사드의 완전한 철수”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도 같은 날 “사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고 했다. 사드가 여전히 양국 간에 불씨로 남아 있다는 의미다.

예고된 상황이기도 했다. ‘협의 결과’ 발표를 하루 앞두고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지난달 30일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밝힌 ‘3불(不)’ 논란은 전략성 모호성 포기가 논란이 됐고, 중국이 언제든 다시 입장을 확인받으려 할 것이란 전망이 나왔었다. 강 장관은 ▶사드 추가 배치 검토 ▶미국 미사일방어(MD) 체제 동참 ▶한ㆍ미ㆍ일 군사동맹으로의 발전 등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강 장관이 입장을 내놓은 장소가 국회 국정감사장이라는 점에 비춰보면 앞으로 말을 쉽게 번복하기도 어렵다.

10월 30일 외교부 등에 대한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의 국정감사가 국회에서 열렸다. 증인으로 출석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박종근 기자

10월 30일 외교부 등에 대한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의 국정감사가 국회에서 열렸다. 증인으로 출석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박종근 기자

데자뷔처럼 반복되는 외교적 대안으로서의 ‘전략적 모호성’에 대한 지적은 현 정부 들어 처음은 아니다.

①미래 가능성 축소한 ‘인도·태평양’ 입장=현 정부에서는 사드 체계 배치 문제로 역대 최저점을 찍은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치중하다보니 미·중 사이에 모호성이 깨지는 사례가 자주 등장한다. 최근 한ㆍ미 정상회담 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대아시아정책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ㆍ태평양’ 개념을 두고 우리 정부의 입장에 혼선이 빚어지자 또 다시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말이 대안으로 등장했다. 아직 개념 정립 중인 ‘인도ㆍ태평양’에 대해 굳이 명확한 입장 정리가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에서였다.

청와대는 8일 밤 공개된 한ㆍ미 공동 언론발표문 중 ‘한ㆍ미 동맹이 인도ㆍ태평양 지역의 번영을 위한 핵심축’이라는 부분에 대해 다음날 “우리는 편입될 필요 없다(김현철 청와대 경제보좌관)”, “우리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청와대 고위 관계자)”고 선을 그었다. 특별히 입장을 밝혀달라는 요구가 들어온 상황도 아니었다. 이는 문재인 대통령이 11일(현지 시각) 베트남 다낭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에서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육ㆍ해상 실크로드)’ 건설을 지지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한다”고 말한 것과도 대비됐다.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은 “‘인도ㆍ태평양’은 아직 ‘지역’적인 개념이지 ‘전략’으로 얘기한 것이 아닌데 우리 스스로가 미국의 전략으로 보고 있고, 반면 중국의 일대일로는 전략적 개념도 있는 것인데 경제 프로젝트라고 하고 있다”며 “‘균형 외교’라고 하면서도 중국쪽으로 가는 인상을 주고 있는데 한·미 동맹도 잘 견지하면서 인도·러시아·동남아 국가 등과 네트워크를 강화해 레버리지를 만들면 된다”고 지적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가 11일 오후(현지시간) 베트남 다낭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APEC정상회의 정상기념촬영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입장하는 쪽을 바라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가 11일 오후(현지시간) 베트남 다낭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APEC정상회의 정상기념촬영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입장하는 쪽을 바라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②북핵 고조 국면에서 ‘레드라인’ 설정=국제사회가 한 목소리로 규탄하고 있는 있는 북핵 국면에서도 모호성의 실패가 도마 위에 오른 바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 8월 17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북한에 대한 ‘레드라인’(Red lineㆍ한계선)을 설정했다. 문 대통령에 따르면 레드라인은 “북한이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을 완성하고 거기에 핵탄두를 탑재해 무기화하는 것”이다. ‘레드라인’에는 ‘선을 넘으면 엄청난 대가를 각오하라’는 지도자의 경고가 담긴 말이지만 그만큼 지도자가 감당해야 하는 무게도 크다.

또 트럼프 대통령이 군사옵션 가능성까지 거론하며 대북 압박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청와대가 ‘한반도 전쟁 불가론’이나 ‘전술핵 재배치 불가론’ 등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히는 것은 북한엔 ‘어떤 도발을 해도 군사옵션은 가동되지 않는다’는 헛된 기대를 심어줄 수 있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③통상 협상력 떨어뜨리는 지도자의 단언=미ㆍ중의 통상 압박에 따른 대응에도 ‘모호성’은 중요한 전략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폐기’까지 거론하며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을 압박했던 지난 9월,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FTA 폐기도 하나의 가능성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백 장관의 발언에 대해 갑론을박은 있었지만 시장에서는 미국의 압박을 이겨내려면 폐기도 불사할 정도의 결연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해석이 나왔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폐기 얘기는 성급하고 우려할만한 일”며 폐기 가능성을 차단했다.

또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 9월 13일 중국의 경제 보복에 대한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여부에 대해 “카드는 일단 쓰면 카드가 아니다. ‘옵션’으로 갖고 있다”며 여지를 남겼지만, 청와대는 하루 뒤 “제소할 생각이 없다. 한ㆍ중 간 어려운 문제에 대해 소통과 협력을 강화해 해결하겠다”고 선을 그었다.

10일 코엑스에서 열릴 예정이던 한미FTA 공청회가 농민단체의 단상점거로 무산됐다. 한국토종닭협회 문정진 회장(오른쪽)과 강성천 산업통상자원부 차관보(왼쪽)가 각자 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강정현 기자

10일 코엑스에서 열릴 예정이던 한미FTA 공청회가 농민단체의 단상점거로 무산됐다. 한국토종닭협회 문정진 회장(오른쪽)과 강성천 산업통상자원부 차관보(왼쪽)가 각자 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강정현 기자

◇국익 우선, 신뢰 지키며 옵션 넓혀야=‘전략적 모호성’은 어느 한쪽 편에 손을 들어주는 것이 득이 되지 않을 때 나타난다. 철저히 자국 중심의 외교 관점에서 모호성을 포기하면 스스로 선택지를 줄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특히 현재의 미ㆍ중의 경쟁 사이에서 중견국으로서의 한국의 입지가 그렇다.

김현욱 국립외교원 교수는 “미·중 경쟁관계가 고조되며 외교적 공간이 줄어든 어려운 상황에서는 입장 표명에 신중하고, 모호성을 취하는 것이 좋은 전략이 될 수 있다”며 “그런 의미에서 현 정부가 표방한 외교 다변화와 균형 외교 전략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제라도 ‘3불’ 등 이미 내뱉은 말에서도 모호성의 여지를 찾아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진창수 세종연구소장은 “예를 들어 한ㆍ미ㆍ일이 군사동맹으로 발전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한·미·일 군사훈련이 포함 될 지 등 어느 수준까지인지는 분명하지 않다”며 “내부 컨센서스를 명확히 갖고 있는 상태에서, 북핵 상황이 더 악화되면 ‘3불’을 지킬 수 없는 점을 강조하며 중국이 더 노력하도록 강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전략적 모호성’만이 최선이 아닌 상황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현 정부 초반에 문제가 됐던 사드 배치 이슈가 그렇다. 국내 여론을 의식해 환경영향평가 결과에 따라 배치하기로 차일피일 미루다가 중국측에 과도한 기대를 심어주게 됐지만, 결국은 북핵 도발 수위가 높아지면서 배치를 결정했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전략적 모호성의 득실은 상황에 따라 다른데 미ㆍ중 사이에서 한국의 핵심 이익이 분명하다면 확실하게 입장을 취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모호하게 하는 것이 ‘전략적 자율성’ 확보에 유리하다”고 말했다. 다만 “미국과 얘기할 땐 미국 입맛, 중국과 얘기할 때는 중국 입맛에 맞추기 시작하면 양쪽 다 신뢰를 잃게 된다”며 “대한민국은 국제 정세 흐름에 맞춰 국익을 반영한 입장을 취하는 나라라는 인식이 확실히 들게끔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유미 기자 yumi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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