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 44년, 후회없어요"

중앙일보

입력

서초구 청사 5층에 자리 잡은 조남호(66) 구청장의 집무실엔 특이한 분위기가 있다.

수천권의 각종 책과 논문 등이 사방에 어지럽게 널려 있다. 직원이나 민원인과 대화를 나눌 때 사용하는 원탁을 제외하고는 온 방이 책들에 점령 당했다. 구청장의 집무실이라기보다는 독서에 미친 기인의 방처럼 느껴진다.

"평소 관심이 많았던 역사와 환경.복지 분야 등 구정(區政)에 필요할 것 같은 책과 논문 등을 모으다 보니 양이 좀 많아졌네요."

조 구청장은 겸연쩍어한다.

책을 좋아하는 조 구청장. 그가 최근 '당신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습니다'라는 책을 출간했다. 관선과 민선 서초구청장을 지낸 13년을 포함, 44년의 공직생활을 정리한 자서전이다.

'당신'에 대한 조구청장의 해석이 재밌다.

"당신은 내가 민.관선 구청장에 재직하며 섬겼던 서초구민과 지인.가족 등이 모두 포함됩니다."

그는 "3선 구청장으로서 임기 마지막 해를 맞아 지나온 길을 정리하고자 틈틈이 적어둔 메모 노트를 참고해 지난해 말부터 집필 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현행법상 지방자치단체장은 3선이상 할 수가 없어 조 구청장은 올해가 공직의 마지막해다.

"솔직히 후임 구청장들에게 나의 경험을 전수해주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고 자서전 발간 이유를 털어놨다.

실제 그가 서초구청장을 하며 모아둔 메모 노트가 100권이 훨씬 넘는다.

총 4장, 350여쪽 분량의 자서전에는 ▶사회복지▶경영행정▶장애인 복지 등 재임 시절 역점에 뒀던 시책들을 사례와 함께 상세히 서술했다.

1962년 서울시청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한 그는 보건사회국장.환경녹지국장을 거쳐 마포.동작.성동 구청장을 지낸 뒤 93년 관선 서초구청장으로 재직하다 초대 민선구청장으로 선출돼 3선을 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지방 행정 전문가다.

'부자 동네'로 소문난 서초구에서 구청장을 지낸 만큼 '어깨에 힘깨나 들어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가졌던 기자의 선입견은 인터뷰를 위해 그를 만난 순간 깨지고 말았다.

2시간여 취재하는 동안 '사람만나고, 이야기하기를 무척 좋아하는 이웃 주민'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가 밝힌 3선 비결도 간단,명료했다.

"깨끗한 공직자, 중앙정치.정당정치에 흔들리지 않고 구민을 상전으로 모시는 겸손한 구청장이 돼자는 것이 저의 신념이었습니다. 구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현장에 충실하다보면 특별한 선거운동도 필요 없습니다."

실제 그는 관용 승용차는 외빈접대용으로만 사용하고 출.퇴근 때는 카니발 승합차를 시청 등을 방문할 때는 지하철.시내버스 등 대중 교통을 주로 이용한다.

구민들에게 '사회복지.환경.교육행정에 힘쓴 구청장'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그는 "서초구민 대부분이 고학력 엘리트층이기 때문에 항상 겸손하고 배우는 자세로 행정을 펼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주민 반발이 예상되는 사업에 대해서도 역지사지(易之思之)의 마음으로 허심탄회하게 설득을 하면 오히려 일하기 쉬운 지역이라는 것을 후배 구청장들에게 조언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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