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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80년 서울의 봄|당국-학원 모두 "밀리면 마지막"|5월, 끝없는 줄다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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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대통령과 계엄사령부의 학원사태·노사분규에 대한 「단호한 조치」경고로 시작된 80년5월은 유난히도 무더웠다.
계엄하의 서슬퍼런 통첩도 고조되는 민주화 열기를 식히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같은 엄중경고와 정면도전이 맞닥뜨려 열도를 더했다.「여기서 밀리면 마지막」이라는 위기의식이 12·12이후 힘의 기반을 굳힌 거의 주도세력과 학원자율화운동을 통해 대열을 정비한 대학가 양쪽에 강하게 작용, 상승효과를 일으켰다. 일방의 굴복에 의해서만 끝나는 제로섬게임의 양상을 띠어갔다.
5월1일 김옥길문교장관은 대학군사교육개선안을 발표하면서 『일부학생들의 요구는 더이상 받아들일수 없으며 병영집체훈련 거부학생들은 모두 의법처리하겠다』고 선언했다.
집체 훈련문제는 학원사태를 정치권으로 비화시키는 단초가 됐고, 각대학이 연계하는 확실한 계기가 됐었다.
『학기초인 3월엔 각대학이 학생회의 견고성 확보에 주력했습니다. 시국문제에 힘을 쏟아야한다는 복학생측의 주장으로 격론이 있었지만 대개는 학내문제가 우선의 목표였읍니다.
4월들어 집체훈련이 이슈화되면서 서울시내 대학학생회장단이 연쇄접촉을 갖기 시작했어요. 대학마다의 입장에 따라 움직이던 대학들은 보안사령관의 정보부장서리겸직등으로 상황이 급박해지자 재단성토등 내부문제에서 눈을 외부로 돌렸읍니다.

<"개입 구실 주지말자">
정치권의 문제가 궁극적인 것이기는 했지만 외부의 상황변화가 투쟁과정을 가속화시켰읍니다. 「당국과의 직접대치는 아직 이르다」「군부에 개입구실을 줘서는 안된다」는 학생회측 의견이 처음에는 다소 우세했지만 점차 몰리는 국면이 되었습니다. 주요당직자 사퇴등 강경슬로건이 나온 배경은 이렇습니다』
당시 학생운동의 리더였던 모씨의 설명이다.
운동방향이 확실한 학생들은 문교장관의 경고에 아랑곳없이 당일 가두시위를 벌였다. 성대생 1천5백여명과 충남대생 1천여명이 경찰과 충돌했다.
그러나 폭넓은 정보수집망이 있는 서울대 회장단은 당국의 심상치 않은 동태를 감지, 대책마련에 부심했다.
대통령·계엄사등의 경고도 경고려니와 전두환정보부장서리의 4·29 간담회 발언이 큰 비중으로 닥쳐왔다.
당시 군의 실세를 대표했던 전장군은 『일부 몰지각한 학생들에 의해 대다수 선량한 학생들이 피해를 보고 면학분위기가 혼탁해지거나 정부의 정당한 방침과 법을 어긴다면 국민이 실망하게 될 것』, 『국민들이 몰지각한 정치세력에 오염되지 않도록 보살펴줘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총학생회장단과 단과대회장들로 구성된 서울대운영위원회는 5월1일 밤부터 2일 새벽까지 마라톤회의를 갖고 집체훈련에 응하기로 결론지었다. 표면적으로는 「안보의식결여라는 의혹을 씻기 위함」이었으나 내면적으로는 군의 개입을 우려한데 있었다.
서울대총학생회장 심재철군은 『더 큰것을 얻기 위해 작은것을 포기했다』는 시사적인 말을 남겼다.
『4월 하순은 온 캠퍼스가 집체거부 열기에 휩싸였어요. 집체거부는 신입생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대학인의 문제라는데 인식을 함께하고 5월2일에 있을 군장검사부터 거부키로 했읍니다. 또 집체기간중 정상수업을 진행해나가며 수업이 안되면 신입생과 선배들이 어울려 열흘간 지낼수 있는 프로그램까지 마련했습니다. 선배들의 연대동맹휴학서명운동등 집체거부의 도도한 흐름이 물결쳤어요.
그런데 운영위가 이 흐름을 바꾸었읍니다. 대학생들이 훈련받기 싫어서 라거나, 안보를 외면하는 이기적 행동을 한다고 국민에게 비칠수도 있고 학원내적인 문제해결을 위해 비상계엄 해제등 본질적 문제로부터 멀어질수 없다는 점등이 급선회의 배경이었습니다. 한달여 계속된 거부결의를 하루아침에 번복한데 따른 학생들의 배반감도 적지 않았어요. 그래서 학생회기반 와해라는 모험을 무릅쓴 것이죠. 총대의원회의 결정을 운영위가 뒤엎은 것이라 학생들의 저항을 살 소지가 충분했거든요』
5월2일 서울대 캠퍼스는 흥분의 도가니였다. 과별·단과대별 비상학생총회에서는 격론이 거듭됐고 이어 열린 「민주화 대총회」에서 개교이래 최대인 1만2천여명의 학생이 운집했다.
격론끝에 집체훈련 응소는 「전술」차원에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학생운동의 방향은 급격히 전환됐다.

<대학원생들도 참여>
학생들은 이날 밝힌 시국선언문에서 △비상계엄 즉각 해제 △정부주도의 개헌논의 저지 △정권유지 위한 기만적 안보분쇄 △유신잔재세력 추방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모든 주장은 시국과 직결됐다.
학생지도부의 결정이 정국긴장을 고조시키는 결과를 낳은 셈이다.
학생들은 총회가 끝난뒤 교문앞에서의 경찰과 대치, 민주화대행진을 벌였다. 이때 「집체훈련이 끝나는 14일까지 비상계엄을 해제하고 계엄해제가 안되면 l5일부터 전면적인 농성·시위에 돌입할 것이며 이에 따라 휴교령이 내려지면 당일 하오3시 영등포로터리에 집결, 가두시위를 벌인다」는 계획이 발표됐다.
집체훈련 거부에서 응소로의 급선회에 대한 반발무마를 위해 「14일」이라는 시한을 설정한게 대학가에는 상황전개의 가속이라는 부담으로 나타났다.
또 당국에도 「단호한 조치」의 실행결심을 재촉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한 학생간부는 『14일이란 날짜에는 원래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그 날은 집체훈련이 끝나므로 그때까지는 뭔가 납득할 만한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정도의 양측 모두를 겨냥한 것이었을 뿐이었다』고 술회한다.
교문에서의 대치·성토가 끝난후 3천여 학생들이 도서관·학생회관에서 성토대회를 겸한 농성에 돌입했다. 고대생 1천여명도 야간시위를 벌이며 경찰과 충돌했다. 이날 지방에서는 충북대·충남대·경북대·전북대등도 시위, 농성을 벌였다.
또 이날 성대와 서강대가 서울대에 이어 병영집체 훈련을 받기로 하고 이틀간의 농성을 풀기도 했지만 학원사태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고위당국자들의 잇단 경고에 이어 치안본부는 교외시위 주동학생을 형사처벌 하겠다고 경고했다.
1∼2일의 가두시위로 경찰관 1백30여명이 부상했다.
이에 3일 서울대생들은 제2차 민주화총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대학원생들도 자치협의회를 구성하고 민주화대행진에 참여했다. 대학원생들은 「현 시국과 민주화 투쟁에 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두김씨」 대립 심화>
4일 상오 서울대생 4천여명은 입소생환송식을 겸해 제3차 민주화총회를 갖고 『계엄연장과 민주일정지연책임을 근로자·학생들에게 전가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등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계엄철폐」등의 플래카드를 두른 입소생 수송버스가 떠날때는 학생·경찰·시민이 함께 애국가를 제창하는 모습도 보였다.
대학가가 시위의 회오리에 빠져들면서 근로자들의 움직임도 거세어 갔다.
4월말 한주 동안에 90여건의 노사분규가 발생했다. 치안본부는 『근로자들의 요구가 정당해도 난동은 묵과할수 없다』고 밝히고 산업시설파괴·폭행자는 모두 구속키로 했다. 사북사태관련자 1백34명이 연행됐다. 이와 달리 유화조치도 있었다. 경북지구계엄분소는 고박정희대통령조상 훼손사건과 관련, 구속됐던 경북대생2명을 석방했다. 신현확총리는 참석을 피했던 국회개헌심의특위에 참석해 『이원집정부제 의도는 없다』『비상계엄은 국민투표 훨씬 이전 사회질서가 안정되는 대로 해제될것』『구속자추가석방·복권검토』등을 밝혔다.
최규하대통령도 6일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민주화 일정에는 변함이 없으며 「정국불투명」의 주장은 오해』라고 말했다. 그러나 최대통령은 『정치발전은 어디까지나 사회안정을 바탕으로 추진돼야하며 이를 위해 폭력이나 난동등 불법적인 행동은 결코 용납될수없다』고 강조했다.
그즈음『군부가 분주해졌다』는 게 당시 고위관계자의 설명이다.
당시 군의 생각과 움직임에 대해선 여권이라 할수 있었던 공화당·유정회인사들도 제대로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은 계엄해제·학원사태등의 논의를 위해 즉각 국회를 소집하자는 신민당의 주장에 『계엄해제는 바람직하나 현재는 여건이 성숙치 않았다』며 국회를 22일께 소집하자고 했다.
전직장관인 한 유정회 소속의원인 S씨는 간부모임이 이따금 열렸지만 서로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는 말밖에는 할수 없었노라고 했다.
야당인 신민당안에는 김대중씨를 지지하는 24명의 의원이 「시국간담회」라는 독자적인 기구를 구성키로 해 두김씨간의 대립을 더해가고 있었다.
야권단합문제는 이미 물 건너간 형편이었고 대학가가 정치권의 제어에 따를 형편도 아니었다.

<대통령 중동순방 결정>
당시의 한 학생회장은 정치권에 대한 학생들의 거부의식이 팽배해 학생운동의 순수성유지를 위해 정치인과는 거리를 두려는 분위기였다고 했다.
예로 공화당고위인사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이 왔지만 피했으며 신민당의원들이 서울대 학생회를 찾아 왔을때 『뭣하러 왔느냐. 일없으면 가라』고 냉대했다는 것이다.
김대중씨가 4월11일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있은 김상진군 기법식때 화환을 보내왔지만 학생들이 즉각 명패를 뗐으며, 농대에서 열린 추모식에는 김씨가 직접 참석했지만 김씨의 참석을 두고 학생들끼리 갑논을박이 있었다. 그리고 김씨가 연설을 하기전 시국과 관련되는 발언을 하지말도록 요청을 하기도 했다.
일부 복학생중에는 정치권과 관계가 있었는지 몰라도 학생전체는 순수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는게 당시 학생회간부들의 주장이다.
한치의 앞을 예측하기 어려운 정국의 혼미속에 유류파동과 겹쳐 경제는 곤두박질을 계속했다. GNP는 16년만에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그런 가운데 유류난 해결을 위한 국가원수의 해외출장이 6일 발표됐다.
대통령의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순방은 고박대통령때부터 약속된 것이었고 유류파동으로 원유확보자체가 어려웠던 상황이라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국내가 소란하고 이에 대응하는 군부동향이 심상치 않던 때라 내부에서 논란이 많았다. 결국 계엄군쪽에서 학생시위가 심해져도 대통령의 부재중에는 군을 가능한한 동원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나서야 최대통령의 순방이 결정됐다. 최대통령은 중동순방에 나서면서 국방차관을 지내 군사정에도 정통한 최광수비서실장을 국내에 남겨두고 핫라인으로 수시 보고를 받고 결심을 내릴수 있는 체제를 갖추었다.
대통령의 중동순방이 발표된 6일은 4·5일의 연휴 다음날로서 일시의 소강상태를 지낸뒤 대학가 시위가 재연되는 날이었다.
서울시내에서만도 연대·외대·동대·성대·숭전대·한신대등 6개대학이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고 이대생들은 「이화민주투쟁의 달」첫날을 맞아 시국성토대회를 가졌다.
학생들의 구호는 이제 어느 대학이고 할것없이 모두 시국문제 일색이었다.
지방에서는 충남대생이 5일째 농성을 벌이는등 대학가 민주화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돼 있었다.
서울대는 정상수업에 들어가 외관상 평정을 유지하는듯 했지만 실은 다음단계를 위한 준비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7일부터 2∼4개 단과대학생들이 모여 철야 시국토론회를 가졌고 특히 계엄해제 요구시한인 14일을 전후한 구체적 준비 및 연락망등이 점검됐다.

<순방중 군동원 자제>
7일의 대학가 소요는 서울의 11개 대학, 지방의 6개 대학에서 계속됐고 8일에는 연대·이대·동대·홍대·숙대가 시위를 가졌다.
특히 연대에서는 원주분교학생들까지 합류한 가운데 횃불시위등을 벌이며 며칠째 농성이 계속됐다. 야간시위에 나선 8백여 외대생가운데는 1백49명이 연행됐다.
강공시위와 강경대응이 수없이 교차되고 있었다.
학원사태가 악화일로를 치닫는 가운데 병가를 얻어 요양중이던 김옥길문교장관은 8일 전국 85개 대학총장등 1백27개 총·학장에게 공한을 보내 『교문밖 집단시위는 민주발전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며 『자제와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목표」를 향해 비탈길을 내닫기 시작한 학생들에게 김장관은 설득력이 없었다.
7일 외대교수일동이 비상계엄해제와 과격한 행동으로 민주화를 해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현시국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고 8일에는 이대교수 3백여명, 숙대교수 80여명도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이어 9일에는 중대교수 2백50여명이, 10일에는 동대교수 1백98명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함으로써 대학가 민주화운동은 절정의 순간으로 치닫고 있었다.
10일은 최대통령이 중동 순방길에 오르는 날이었다.
9일 하오5시부터 10일 새벽4시까지 11시간동안 고려대 학생회관에서 회합을 가진 23개 대학 총학생회장들은 『당분간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교내시위를 하는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선언했지만 그러한 다짐도 오래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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