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인터넷 판매 ‘먹는 낙태약’ … 의사들 “불완전 유산 위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 청원 코너에 낙태죄 폐지 청원에 동의한 사람이 23만여 명에 달하면서 낙태 논란에 다시 불이 붙었다. 이들은 “원치 않는 출산은 당사자와 태어날 아이, 국가 모두에게 비극적인 일”이라며 “낙태죄를 폐지하고 먹는 자연유산 유도약(일명 미프진)을 도입해 달라”고 주장한다. 이번에는 미프진 합법화 요구가 추가되면서 종전보다 양상이 다소 달라졌다.

낙태죄 폐지 23만 명 청원 속 논란 #“중절수술 건강 해쳐, 약이 쉽고 안전” #업자 “99.9% 효과” 불법광고도 판쳐 #의사들은 “목숨까지 위태” 반대 입장 #“낙태 자체가 여성에 피해 줘” 주장도

미프진은 국내에 들어올 수 없다. 형법(269조)에서 낙태를 엄격히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프진은 프랑스가 개발해 1988년 판매가 승인됐다. 태아가 성장하는 데 필요한 호르몬 생성을 억제하고 자궁을 수축시켜 유산을 유도한다. 여성민우회에 따르면 미국·영국·호주·스웨덴 등 61개국에서 의사의 처방이 필요한 전문의약품으로 판매된다. 김영희 대한약사회 홍보위원장은 “외국의 경우 임신 9주(70일) 이내에 의사의 처방을 받아 살 수 있지만 한국에는 허가되지 않은 약”이라고 말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러나 인터넷에서는 ‘쉬운 낙태, 안전 낙태’ ‘부작용·후유증 없는 먹는 낙태약’ 등 불법 광고가 판친다. 취재진이 3일 한 인터넷 사이트에 구입을 문의했다.

“먹는 낙태약을 구할 수 있나요.”(기자)

“임신 11주까지 복용하는 약을 판매합니다. 39만원이고 배송에 하루 이틀 걸립니다.”(판매자)

“낙태약을 사도 법에 걸리지 않나요.”(기자)

“법에 걸릴 수 있지만 구매자가 자수하기 전에는 못 찾아요.”(판매자)

“복용만 하면 낙태가 되나요. 부작용은 없나요.”(기자)

“성공률이 99.9%입니다. 발열·오한·구토 등이 나타날 수 있는데 이는 약효가 있다는 뜻이지요. 자궁염·골반염이 생길 수 있지만 1만7000명 중 1명꼴에 불과합니다.”(판매자)

이번 청와대 국민청원인도 청원 개요에서 “12주 안에만 복용하면 생리통 수준과 약간의 출혈로 안전하게 낙태된다”며 “현행법이 금지하는 불법 낙태 수술을 받을 경우 자칫하면 사망에 이를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약의 부작용을 호소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한 여성은 포털사이트에 “임신 11주에 미프진 먹고 낙태가 안 돼 병원 갔더니 불완전 유산이라고 했다. 지금도 하혈 중인데 위험한 건지 괜히 걱정된다”고 호소했다.

산부인과 의사 중 이 약의 합법화, 나아가 낙태 합법화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별로 없다. 대신 위험성을 경고한다. 주웅(대한산부인과학회 사무총장) 이대목동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외국에서 임신 주수와 자궁외임신 여부 등을 진단하고 약을 써도 될 때만 처방한다”고 말했다. 최안나 국립중앙의료원 난임센터장은 “먹는 낙태약은 태반 일부가 자궁에 남아 출혈을 일으키는 불완전 유산 위험이 있다”며 “출혈이 심하면 산모 목숨이 위태로워진다”고 말했다.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여성단체 회원들이 5일 서울 홍익대 인근에서 집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여성단체 회원들이 5일 서울 홍익대 인근에서 집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반면 불법 낙태가 여성 건강을 위협하기 때문에 낙태죄를 폐지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노새 한국여성민우회 여성건강팀 활동가는 “낙태 수술을 한 병원에서는 수술 후 출혈 같은 후유증이 심해도 낙태가 불법이라 떳떳이 도움을 요청하거나 항의하기 힘들다”며 “여성에게만 책임을 묻는 낙태죄 때문에 여성의 건강과 안전이 크게 위협받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김현철 낙태반대운동연합 회장은 “낙태는 태아의 생명을 제거하는 것일 뿐 아니라 여성에게도 육체적·정신적인 피해를 주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한다”며 “낙태는 여론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다. 공론화 자리를 조속히 만들어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생명 경시와 여성의 자주적 결정권이라는 틀에 박힌 논쟁에서 벗어나자는 주문도 있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여성만 처벌받는 상황만큼은 피해야 한다”며 “여성이 출산을 결심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 시스템을 마련하고, 생명과 여성의 자주권을 함께 보호할 수 있는 해법을 시급히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선영 기자 kim.sunyeo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