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그 자리에 바디캠이 있었다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심재우
심재우 기자 중앙일보 뉴욕특파원
심재우 뉴욕특파원

심재우 뉴욕특파원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에서 시작된 할리우드 성추문 파문이 연일 미국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올해 팔순을 맞은 원로배우 더스틴 호프먼도 1985년의 일로 사과했고, ‘엑스맨, 최후의 전쟁’ 등 블록버스터 영화를 제작해 온 브렛 레트너 감독의 나쁜 버릇 또한 결국 들통이 나고 말았다.

어디 할리우드뿐이겠는가. 어느 영역이건 쥐꼬리 이상의 권력을 잡고 있는 남정네들이 제 버릇 남 못 주고, 자신의 잘못도 모른 채 하던 대로 행동하다 피해 여성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문제는 기억이다.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피해자의 기억을 가해자가 복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듯하다. 하나같이 “기억이 안 난다”며 발뺌부터 한다. 이럴 때 차 안의 블랙박스 영상처럼 그날의 동영상을 틀어 주면 아무런 변명도 못하지 않을까.

실제 몸에 달거나 붙이는 바디캠(Body cam)을 이용해 자신의 24시간을 동영상으로 오롯이 간직할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았다. 카메라가 점차 소형화하고 데이터 저장 기술이 발달하고 있어 가능하다.

이미 차량 블랙박스처럼 바디캠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이 눈에 뜨이고 있다. 뉴욕 관광객 중에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광경을 모조리 디지털 데이터로 남기기 위해 조그만 동영상 촬영기를 머리에 이고 다니는 사람이 꽤 있다. 사이클 애호가들이 머리나 어깨에 달고 다니던 소형 카메라가 발전한 경우다.

미국 경찰이 제복에 달고 다니는 바디캠은 근태관리용으로도 쓰이지만 혹시나 있을 법적인 분쟁에서 증거로 사용할 목적으로 5만 명에게 보급돼 있다. 시비가 자주 붙는 주차단속원도 바디캠을 차고 다닌다.

영국의 베리우드라는 정신병원에서 직원들에게 바디캠을 착용시킨 결과 이를 의식한 환자들의 공격성이 누그러졌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서울 강남에 폐쇄회로TV(CCTV) 카메라 장착을 늘렸더니 범죄율이 소폭 떨어진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민간인들 사이에서는 부작용이 적지 않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양해를 구하고 촬영할 수도 있겠지만 눈에 뜨이지 않는 초소형 카메라의 경우 언급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럴 경우 초상권 침해가 우려된다. 또 구글과 페이스북 등에 올라간 대용량 프라이버시가 인공지능(AI)의 알고리즘에 의해 악용될 수 있는 소지도 많다.

무엇보다 바디캠은 인간적인 속성을 제거한다. 상대방이 24시간 동영상 일기장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면 두 사람 간의 대화가 얼마나 솔직하고 담백하게 이뤄질지 의문이다. 이미 우리는 식탁에서 가족 간 대화의 대부분을 스마트폰에 빼앗긴 상태다. 인간미를 유지해 줄 바디캠을 원한다.

심재우 뉴욕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