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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작가들에게 작업실 내주고, 아이들에게 추억 심어주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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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서울 서촌 투어를 진행하고 있는 설재우씨. [사진 설재우]

서울 서촌 투어를 진행하고 있는 설재우씨. [사진 설재우]

서울 인왕산 수성동 계곡 초입에 독특한 복합문화공간이 있다. 설재우(36)씨가 운영하는 ‘별안간’이다. 빨간 벽돌 건물 3층에 자리잡고 있다.

전방위 문화기획자 설재우씨 #2008년부터 서촌의 일상 기록 #주민이 주인 돼야 마을 살아나 #통인시장 게스트하우스 운영도

‘별안간 주인장’ 설씨는 자칭 문화 인큐베이터다. “딱히 갈 곳이 없는 프리랜서를 위한 공간입니다. 젊은 작가·번역가·디자이너·건축가 등에게 무료로 개방해요. 지역 문화인이 스스로 일어서는 힘을 키워주고 싶습니다. 운영비(월평균 230만원)는 제가 벌어서 해결하고요. 매주 금요일에는 동네 아이들을 위해 춤판을 벌이고 영화도 보여줍니다.”

설씨는 서울의 ‘핫 플레이스’인 서촌(西村) 지킴이다. 이곳 토박이로 서촌이 뜨기 훨씬 전부터 지역 문화 활동을 펼쳐왔다. 2008년 블로그 ‘효자동 닷컴’에서 마을의 숨은 이야기를 찾기 시작했다. 2012년 동네 구석구석을 소개한 『서촌방향』을 내며 주목을 받았다. 지금도 1년 365일 ‘서촌 기록자’ ‘서촌 알림이’로 뛰고 있다.

설씨의 슬로건은 ‘주민에서 주인으로’다. “지금까지 지역 정책은 주민 수가 기준이었어요. 인구가 줄어들고, 고령화가 가팔라지는 시점에선 방향 전환이 필요합니다. 내가 살고 싶은 곳을 만드는 것, 즉 지역 애정지수를 키워 나가야 합니다.”

그는 전방위 활동가다. 사라지는 것의 ‘오래된 가치’를 일깨우고 있다. 문방구·빵집·꽃집 등 노포(老鋪)들의 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돕고, 골목을 잃어버린 아이들이 마을을 돌아다니는 ‘추억 만들기’ 프로그램을 꾸려간다. 외지인 대상 동네 탐방도 연평균 60회 진행한다. 서촌 곳곳의 옛 사진과 현재 모습을 겹쳐서 보여주는 ‘포토 매칭’ 작업도 흥미롭다. 오래전 문 닫은 전자오락실을 인수해 2년 전 다시 열기도 했다. 서촌 명소 통인시장의 야채가게 2층에 타지인이 하루 묵고 가는 게스트하우스도 운영하고 있다.

“통인시장은 요즘 관광시장이 됐습니다. 지역민이 잘 가지 않는 시장이 됐어요. 먹고 마시는 것 중심이죠. 정작 사람들은 서촌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체험하고 싶어하는데 말이죠. 정부가 추진하는 전통시장 활성화도 문화전문가가 거들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임대료가 높아지면서 토박이 상인들이 쫓겨나고 있거든요. 저는 관트리피케이션(관+젠트리피케이션·정부가 낙후된 구도심을 활성화시키며 중산층 이상이 유입돼 저소득층 원주민을 대체하는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박정호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