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칼라 범죄 엄정하게 판결해야" 이용훈 대법원장 속뜻 뭘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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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64.사진) 대법원장의 최근 행보에 대해 법원 내에서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 대법원장은 최근 서울중앙지법 소속 판사들과 고법 부장판사로 승진한 법원 고위간부들을 잇따라 불러 사법부 개혁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힌 것으로 17일 알려졌다. 이 대법원장은 이들에게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한 엄격한 처벌을 주문한 것으로 전해졌다. 기업인들의 탈법.불법 행위를 겨냥한 것이다.

천정배 법무부 장관도 최근 "화이트칼라 범죄는 자유시장 경제질서를 교란하는 사범이기 때문에 좀 더 분명한 단죄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법원 내부에서는 이 대법원장의 발언을 놓고 '소신의 표현'이라는 긍정론과 함께 '사법부 수장으로서 적절치 않은 일탈'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 "소신인가 파격인가"=이 대법원장은 9일 서울 한남동 공관에서 열린 법원 고위간부들과의 만찬에서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려면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해 엄정하게 판결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복수의 참석자들이 전했다. 그는 특히 "최근 언론에 보도된 사건은 사법부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렇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남의 집에서 1억원어치 물건을 훔친 사람에게 실형을 선고하지 않는 법관은 없을 것이다. 200억.300억원씩 횡령한 피고인에 대해 집행유예를 선고하면 국민이 어떻게 수긍하겠나"는 말도 했다고 한다.

이 대법원장의 발언은 만찬 하루 전인 8일 횡령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두산그룹 오너(사주) 일가에 대해 서울중앙지법이 집행유예를 선고한 데 이어 나온 것이다. 당시 법원 판결에 대해 언론 등에서는 "솜방망이 재판"이라고 비판했다. 만찬에 참석했던 한 판사는 "대법원장이 두산 사건의 재판 결과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것"이라고 전했다. 또 다른 참석자는 "이 대법원장이 특정 판결에 대해 개인적 평가를 했다는 점에서 파격적이었다"고 말했다.

김종훈 대법원장 비서실장은 "당시 대법원장이 두산 사건을 특정하지 않았다"며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해 양형기준을 엄격히 적용해야 한다는 평소 지론을 밝힌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대법원장은 취임 초 기자간담회에서 "사회 지도층 인사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 서민의 경우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조사해 개선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 "재판권 침해 논란"=한 중견 판사는 "이 대법원장이 법관의 재판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헌법에 의해 독립된 개별 법관의 재판 결과에 대해 대법원장이 가치판단을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헌법 제103조에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해 심판한다'고 돼 있다. 법원조직법 등에 따르면 대법원장의 권한은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재판장▶일반 법관(대법관 제외)에 대한 임명권▶사법부 행정사무에 대한 지휘.감독권 등을 가질 뿐이어서 일선 법원의 구체적인 사건에는 간여할 수 없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대법원장의 발언은 재판의 독립성에 영향을 줄 것"이라며 "당장 두산 사건의 항소심 재판부를 비롯해 판사들에게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영수 고려대 법대 교수는 "대법원장의 의견 표명이 판사들에게 일방적인 지시로 비춰질 수 있다"며 "대법원장의 인사권이 판결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나라당은 논평을 내고 "대법원장의 발언이 사법권의 독립과 재판의 독립을 훼손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서울고법의 한 판사는 "우리 사회가 청렴하지 못한 데에는 판사들 책임이 크다는 대법원장의 평소 소신과 큰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 "과거 유산 청산하겠다"=이 대법원장은 변호사 시절 주요 기업체의 사건 변론을 했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사건 때 대통령의 대리인을 맡기도 했다.

지난해 9월 취임 때는 "권위주의 시대에 국민 위에 군림하던 유산을 청산하겠다"며 과거사 반성을 강조했다. 인사에선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이 활동했던 법조계 사조직인 '우리법 연구회' 출신의 이광범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장과 김종훈 비서실장 등을 중용했다.

김종문.백일현 기자

◆ 두산 비자금 사건=지난해 7월 말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 측이 "박용성(당시 회장)씨 등이 1700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했다"며 검찰에 진정서를 내면서 불거졌다. 서울중앙지검은 286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박씨 형제 등 총수 일가 4명과 회사 임직원들을 지난해 11월 불구속 기소했다. 법원은 8일 관련자 전원에게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다.

◆ 화이트칼라 범죄=정치인.공무원.금융인.기업인 등이 관련된 뇌물.횡령.회계부정 등의 형사사건을 지칭하는 말로 절도 등 민생 범죄를 일컫는 '블루칼라 범죄'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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