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관문 지난 문재인式 실험… 무분별 확대는 “포퓰리즘” 우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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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리원전 5, 6호기 공론화위원회가 20일 내놓은 결론을 바라보는 청와대의 시선은 비교적 고무적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대선 때 내건 ‘건설 중단’ 공약은 지켜내지 못했지만 앞으로 탈(脫) 원전이라는 큰 틀의 에너지 전환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동력을 얻었다고 청와대는 보고 있다. ‘국민 주권’을 강조하는 문 대통령이 ‘문재인식(式)’의 첫 의사결정 실험을 비교적 무난하게 마무리지었다는 자체 평가도 나온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월 19일 오전 부산 기장군 장안읍 해안에 있는 고리원전 고리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월 19일 오전 부산 기장군 장안읍 해안에 있는 고리원전 고리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공론화위의 발표 뒤 기자들과 만나 “상당히 감동적이었다”는 표현을 썼다. 시민이 참여한 의사결정이라는 ‘명분’과 탈원전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실리’를 모두 얻었다는 판단에 따른 발언이었다.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도 이날 페이스북에 “공론화위의 권고 결정 발표를 지켜보면서 놀라움과 함께 경건해지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고 했다.

그동안 교과서에 주로 등장하던 숙의민주주의가 실제 정책 결정에 활용됐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선 평가가 우호적이다.

한국정책학회 대선 공약평가단장이었던 나태준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숙의민주주의와 시민민주주의가 공론화위 과정을 통해서 실제로 처음 구체화됐다”며 “우리나라가 한 단계 더 발전을 했고, 역사적 의의도 있다”고 평가했다.

김민호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행정법) 교수는 “과거 대통령들은 논란이 있더라도 그대로 공약을 추진하려던 경향이 있었다”며 “이번에는 대통령 공약을 힘으로 밀어붙이기보다는 공론화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20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공론화위의 발표 이후 김지형 공론화 위원장으로부터 신고리 원자력발전 5·6호기 조사결과를 전달받고 있다. [연합뉴스]

이낙연 국무총리가 20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공론화위의 발표 이후 김지형 공론화 위원장으로부터 신고리 원자력발전 5·6호기 조사결과를 전달받고 있다. [연합뉴스]

청와대는 다른 갈등과제에도 공론화 방식을 적용할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공론화위에 뭘 부칠 것이냐는 앞으로 논의해야 한다”면서도 “국가가 주체인 문제에 범국민적 공론이 필요한 부분들이 공론화위 대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 문 대통령은 지난 10일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은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는 일”이라며 “신고리 5, 6호기만의 해법이 아니라 공론화에 의한 숙의민주주의를 통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더욱 성숙시키면서 사회적 갈등 사안의 해결 모델로 만들어 갈 것을 당부한다”고 했었다.

당장 원전 문제와 밀접한 ‘사용 후 핵연료’를 처리는 문제가 다음 공론화위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미 2013년 10월부터 20개월 동안 공론화위 활동의 대상이 된 적이 있고, 새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따라 고준위 폐기물 발생량이 변화될 가능성이 커서 새로 의견을 모아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같은 의사결정 방식의 확대에 대해선 신중할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나태준 교수는 “이번 결정은 국가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결정을 하면서도 결단을 하지 못하고 책임을 면하는 듯한 인상을 준 것도 사실”이라며 “면피성 행정이 되지 않기 위해선 앞으로 어떤 안건에 대해 공론화위 과정을 거칠 것인지를 충분히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헌법) 교수는 “공론화위가 정부의 정당성을 획득하는 수단이 되면 의미가 없다”며 “공론화위는 정말 예외적으로 사용하되 대표성과 전문성, 편향성 문제가 모두 해소돼야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증세와 복지 문제처럼 정책으로 인한 이익과 부담의 주체가 서로 갈리는 사안에 대해선 무분별한 공론화 방식의 도입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김민호 교수는 “갈등의 조정에는 공론화위 모델이 신선할 수 있지만 정책의 결정에 이 방법을 쓰는 것은 효용성보다는 위험성이 더 클 수 있다”며 “경우에 따라선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 될 수 있고, 그것이 확대되면 포퓰리즘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번 결정이 문재인 정부의 국정운영 동력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윤종빈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정부가 의도한대로 정책이 진행이 안 됐다는 점에서 그동안 추진하던 적폐청산 등의 국정운영에 브레이크가 걸리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며 “단기간에 어떤 결론을 내려는 공론화위라는 방식 자체도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허진 기자 b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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