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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한국은 독일과 스페인, 어느 쪽을 따를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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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논설위원 고용노동선임기자

김기찬 논설위원 고용노동선임기자

한국의 지난해 무역의존도는 80.8%였다. 교역을 통해 먹고사는 나라라는 얘기다. 중국이나 미국·일본처럼 인구가 많고 땅덩어리라도 넓으면 내수가 받쳐줄 텐데 그렇지 못하다. 결국 다른 나라보다 더 잘살려면 무역에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그런 면에서 한국은 ‘중규모 개방경제’를 지향하는 국가인 셈이다.

고통 분담 용어 사라진 노동정책 #70~80년대식 노동법, 확 고쳐야 #노사 자율 영역을 규제하면 곤란 #정부가 끌기보다 노사에 맡겨야

독일도 그렇다. 무역의존도는 70%가 넘는다. 선진국으론 드물게 수출 주도형 경제다. 하지만 2000년대를 전후해 전 세계가 호황을 누릴 때 독일 경제는 실업률이 10%를 웃돌 정도로 만신창이였다. 오죽하면 1999년 6월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가 독일을 ‘유럽의 병자’라 했겠는가. 그러나 슈뢰더 총리가 ‘어젠다 2010’이란 메스를 들면서 독일의 운명은 반전됐다. 정리해고 요건 완화, 실업급여 삭감, 세금 감면, 연금개혁, 시간제 일자리 확대 같은 정책을 내놨다. 여기에 노조는 임금을 깎거나 동결하며 동참했다. 99~2008년 실질임금은 연평균 마이너스 0.5%를 기록했다. 해외로 공장을 옮기려던 기업이 눌러앉았다. 독일이 유럽 경제의 맹주로 우뚝 선 배경이다.

스페인은 독일과 다른 길을 걸었다. 호황기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노동개혁을 주문했다. 그러나 콧방귀를 꼈다. 호황에 취해 있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엄습하자 경제가 무너졌다. 그제야 노동개혁(2012년)을 단행했다. 근무시간과 직무를 쉽게 조정할 수 있게 하고, 정리해고 요건도 완화했다. 3분기 연속 매출이 감소하면 해고할 수 있게 했다. 어떻게 됐을까. 2014년 2분기부터 2015년 1분기까지 1년 동안 스페인에서 창출된 일자리는 유로존에서 독일에 이어 둘째로 많았다. 정리해고는 오히려 70.4%나 줄었다.

프랑스도 주변국의 노동개혁을 뒤쫓았다. 2015년 12월 1일부터 엘콤리법(Loi El Khomri)을 시행했다. 10인 이하 사업장은 1분기 동안, 50인 미만 사업장은 2분기 연속, 300인 이상은 4분기 연속 매출이 떨어지면 경영상 해고가 가능하도록 했다.

일본은 파견근로자 고용 기간을 5년으로 늘렸다. 아베 정부가 임금 인상을 독려했지만 노조는 “일본은 공산국가가 아니다. 임금제도는 회사가 잘되는 방향으로 짜야 한다”(2014년 1월 후지쓰 노조위원장)며 노사 자율을 견지했다. 실질임금 상승률이 지난해 0.7% 반짝 상승했다 올해 1분기 마이너스 0.3%로 돌아선 이유 중 하나다.

한국에선 노동개혁이란 말이 사라진 지 오래다. 선진국이 노동개혁으로 치고 나가는데 오히려 역주행한다.

외국 정부는 법인세를 낮추며 공장부지 쇼핑에 나선 글로벌 기업을 유혹하고 있다. 한국은 법인세를 올리겠다는 입장이다. 일 안 해도 해만 바뀌면 자동으로 임금이 오르는 70~80년대 호봉제가 다시 대세가 됐다. 성과연봉제는 ‘적폐’로 분류됐다. 최저임금도 확 올랐다. 여기에 통상임금 논쟁까지 더해졌다. 비정규직을 고용하면 악덕 기업으로 여론재판에 회부된다. 기업별 특성은 안중에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노동의 가치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한데 소득을 올리겠다면서 생산성 향상 대책은 없다. 지난 19일 취임 100일 대국민보고에선 노조 조직률을 끌어올릴 생각도 피력했다. 노사 자율 영역이 어느새 정부 정책으로 편입된 모양새다.

희한하게 요즘 정책에선 ‘고통 분담’이란 말이 사라졌다. 고용시장을 다루는 선진국의 기조는 하나같이 고통 분담의 원칙을 깔고 있다. 한데 한국에선 경영계가 안 보인다. 노사라는 양축이 아니라 노조축만 도드라진다. 그래서 일방적 고통 주기라는 얘기도 나온다. 그동안의 노동 경시에 대한 보상이라는 반박도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한쪽 축이 부러진 상태에서 잘 굴러갈지 의문이다.

그래서일까. 최근 한국에 공장을 설립하겠다는 외국 기업의 소식이 뚝 끊겼다. 오히려 한국GM 등이 나간다는 소문만 무성하다. 심지어 토종 기업인 경방과 전방조차 “공장을 옮기겠다”고 한다. 이러다 아예 본사까지 외국으로 이전하는 기업이 나오지 말란 법도 없다.

한 정부 관계자는 “경제는 그래도 잘 굴러가는 편”이라고 했다. 착시현상에서 비롯된 착각이다. 반도체와 석유화학 같은 일부 업종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기업이 아우성이다.

이래서야 ‘중규모 개방경제의 한국’을 유지할 수 있을까. 4차 산업혁명이 몰아치는 시대에 우리 노동법은 70~80년대의 틀을 고수하고 있다. 여기에 역주행이 더해지면 기초 체력마저 갉아먹을 수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이기려면 글로벌 시장에 통하는 정책을 내놔야 한다. 한국기업을 짓누를 기회를 엿보는 외국의 매서운 눈이 섬뜩하다.

김기찬 논설위원·고용노동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