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우리에게 성역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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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비판은 언론이 다루기 힘든 영역이다. 우선 초월적 존재를 논하는 만큼 상식과 합리의 잣대만을 들이대기 어렵다. 1999년 시사 프로그램 방영을 둘러싸고 빚어진 'MBC 주조정실 점거'사태가 시사하듯 후유증 역시 만만치 않다.

이런 저런 이유로 종교 문제는 언론의 관심사에서 비껴나 있다. 이런 상황에서 KBS의 한 시사 프로그램과 모 종교단체의 '20년 악연'은 진위를 떠나 성역에 도전하는 언론의 자세와 역할을 다시 생각케 한다.

1년 전 KBS '추적 60분'팀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그리고 얼마 후 제작진은 한 권의 비디오 테이프를 입수했다(구체적 과정은 신원보호를 위해 생략).

이 테이프엔 충격적 내용이 담겨 있었다. 종교단체 영생교의 신도들을 살해.암매장했다는 사실뿐 아니라 시체를 묻은 장소까지 폭로하는 한 남자의 고백이 있었던 것이다.

'추적 60분'(토요일 밤 9시50분)과 영생교의 인연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83년 8월과 94년 3월, '추적 60분'은 이 종교 단체의 구타.폭행 및 암매장 의혹 사건을 추적한 바 있다. 이후 취재가 중단됐지만 잊은 건 아니었다. 다음 취재를 위해 상당수 자료가 축적.정리돼 있었다.

은밀한 취재가 시작됐다. '두달 후 방영'식으로 시한을 정해두면 무리한 보도가 나올까 싶어 방영 시기도 정하지 않은 채 완벽을 추구했다. 전문가를 동원, 비디오에 나온 야산을 찾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들고 교단 내부에 잠입해 교주 조희성씨의 강연과 신도들의 모습 등을 담는 데도 성공했다.

내부 비리를 폭로할 제보자들도 접촉했다. '추적 60분'은 무병장수를 약속한 조씨가 당뇨병 등으로 병원신세를 진 사실, 수십억원에 달하는 재산을 가족명의로 분산한 사실도 취재했다.

이때 제작진에게 고민이 닥친다. 검찰 역시 같은 사안을 추적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특종'이냐 '사법적 단죄'냐. 이 어려운 갈림길에서 '추적 60분'은 '특종'욕심을 버린다.

94년에 이어 이번에도 취재의 주축을 담당한 송재헌 PD는 "검찰이 미디어의 접근을 극도로 꺼린다는 얘기를 듣고 고민 끝에 수사에 간접 개입하지 않기로 했다"며 "개인적 욕심도 좋지만 이번에는 사회정의를 위해 사법적 단죄가 꼭 필요하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검찰이 교주 조씨를 살인교사 혐의로 긴급체포한 것을 계기로 '추적 60분'은 지난 16일과 23일 각각 '죽음의 영생교 1년 간의 추적- 신도살인 암매장 사건''20년의 추적 -조교주와 영생불멸'이란 제목으로 방송을 내보냈다. 지난 1년, 더 나아가 20년간의 추적기가 함축된 작품이었다.

두번에 걸친 방송은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방송사 홈페이지에는 무려 1천건에 달하는 네티즌들의 글이 올라왔다.

물론 교주가 구속됐다고 하나 법원의 판단이 내려진 상황은 아니어서 실체적 진실을 단정하긴 힘들다. 홈페이지에는 "KBS가 안티 교단의 말만 믿고 왜곡보도하고 있다"는 신도들의 반박글도 많이 올라와 있다.

하지만 20년간 민감한 주제를 놓지 않고 이어온 이 프로그램의 추적 정신과 끈기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시사고발 프로가 연성화되고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는 상황에선 더욱 그렇다.

KBS의 한 관계자는 "KBS는 그동안 사안이 확대될 것 같은 문제엔 늘 약한 모습을 보여 왔다"며 "이제부터라도 사회의 성역을 깨는 데 KBS가 앞장섰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상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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