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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100일, 하루 평균 5회…'집회의 성지' 된 광화문광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8일 오후 다음날 열릴 '도심 속 봅슬레이' 행사를 위해 세워진 초대형 워터 슬라이드 구조물 사이로 정부서울청사와 광화문 북측 광장에서 동시에 다른 두 집회가 열리고 있다. 홍상지 기자

18일 오후 다음날 열릴 '도심 속 봅슬레이' 행사를 위해 세워진 초대형 워터 슬라이드 구조물 사이로 정부서울청사와 광화문 북측 광장에서 동시에 다른 두 집회가 열리고 있다. 홍상지 기자

약 8만2000㎡(약 2만5000평). 서울 광화문에서 세종로사거리 사이에 사람이 설 수 있는 공간의 크기다. 이 곳에서는 최근 하루 평균 4~5회의 집회가 열린다. 지난해 말에 촛불집회가 시작된 뒤 광화문은 집회의 '성지'가 됐다. 사람들이 모여 구호를 외치고 피켓을 든다. 외국인 관광객들은 신기해 하며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인근 회사 직장인들은 무심히 지나친다. "또 뭐 하나봐." 주변 상인들의 대화에 흔히 등장하는 말이다.

촛불집회 이후 집회 일상화 된 광화문 #동물복지·장애인 권리 등 다양한 주제 #청와대 주변 집회·시위도 크게 늘어 #광화문 인근 직장인·주민 불편 호소도

18일(금요일) 광화문의 풍경은 이랬다. 광장 남측에는 3년째 자리를 지켜온 세월호 추모 공간이, 정부서울청사 옆의 세종로공원에는 설악산 케이블카 건립을 저지하려는 이들의 농성텐트가 있었다. 그 반대편인 열린시민마당 앞에는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민주노총과 미군기지 환수를 주장하는 환수복지당의 천막이 나란히 자리잡았다. 천막에는 '시민의 통행을 방해하니 20일까지 철거하라'는 내용의 종로구청 공문이 붙어 있었다.

광화문광장 중앙에서는 다음 날 열리는 '도심 속 봅슬레이' 행사를 위한 초대형 워터 슬라이드가 설치 작업이 한창이었다. 이날 광화문 일대에서 열릴 것으로 예고된 집회는 네 개였다. 세종대로는 일찌감치 차량 통행이 제한됐다.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동물권단체 케어 회원들이 살충제 달걀 근본적 대책을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연합뉴스]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동물권단체 케어 회원들이 살충제 달걀 근본적 대책을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오쯤 제일 먼저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동물보호단체들의 '살충제 계란 파동' 대책 마련 촉구 집회가 열렸다. 이들은 철제 우리를 준비해와 '살충제를 맞는 닭'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우리 안에서 닭 머리 탈을 쓴 두 사람이 분무기에서 뿌려지는 액체를 맞으며 버둥댔다.

18일 광화문 광장 남단 횡단보도 사이에서 설악산 케이블카 반대 시위를 하고 있는 박그림 대표(왼쪽). 홍상지 기자

18일 광화문 광장 남단 횡단보도 사이에서 설악산 케이블카 반대 시위를 하고 있는 박그림 대표(왼쪽). 홍상지 기자

동물 단체의 퍼포먼스가 진행될 때 광장을 오가는 횡단보도 앞에서는 피켓 시위가 진행됐다. 세종로공원에 농성텐트를 두고 설악산 케이블카 반대 시위를 하는 박그림(71) 녹색연대 대표였다. 한 달 전 강원도에서 상경한 박 대표는 매일 오전 11시에 광화문광장 북단에서 171배(설악산국립공원은 천연기념물 171호다)를 하고 점심시간에 시위를 한다.

오후 2시쯤 정부서울청사 앞 인도에 무대가 설치됐다. 무대 앞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이들은 '전국재가장기요양기관연합회' 회원들로 정부에 장기요양급여 수가 인상 등을 요구하는 결의대회를 벌였다. 같은 시간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는 보수단체들의 '문재인정권퇴진촉구 애국의병혁명본부' 출정식이 열렸다. 이들이 구호를 외치는 동안 옆 집회 측 스피커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흘러나왔다.

18일 오후 광화문에서 집회 중인 참가자들이 세종문화회관 인근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홍상지 기자

18일 오후 광화문에서 집회 중인 참가자들이 세종문화회관 인근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홍상지 기자

세종문화회관 인근에서는 집회 참가자들이 햇빛을 피해 앉아서 더위를 식혔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세종문화회관 보안요원 이모씨는 "정권이 바뀌면 이쪽이 좀 조용해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참 다양한 일로 다양한 사람이 모이고 있다"고 말했다.

오후 4시쯤 보수단체들이 떠난 자리에 이번에는 휠체어를 이들이 단체로 나타났다. 광화문역에서 5년째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장애인수용시설 폐지 등을 촉구하는 농성을 벌여온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회원들이었다. 이들이 주최한 농성 5주년 기념 집회로 광화문 북측 광장이 가득 메워졌다. 이들이 준비한 밥차도 등장했다. 이 집회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오후 11시쯤 남은 200여 명은 돗자리와 침낭을 깔고 누웠다.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광화문공동행동' 관계자들이 18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농성 5주년 집중결의대회를 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광화문공동행동' 관계자들이 18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농성 5주년 집중결의대회를 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18일 광화문 북측 광장에서 장애인 차별 철폐 농성 참가자들이 노숙 농성을 하기 위해 돗자리·침낭 등을 깔아놨다. 하준호 기자

18일 광화문 북측 광장에서 장애인 차별 철폐 농성 참가자들이 노숙 농성을 하기 위해 돗자리·침낭 등을 깔아놨다. 하준호 기자

광화문 일대를 관할하는 서울 종로경찰서의 정보과 소속 경찰관은 "촛불 정국 이전에는 광화문일대에서는 1인 시위가 하루에 한두 건 벌어지는 정도였다. 요즘에는 사실상 시위 성격을 갖는 기자회견, 문화제를 포함한 집단 시위가 너댓 건씩 진행된다"고 말했다. 문화제나 기자회견 형식으로 진행되는 집회는 경찰에 미리 신고할 필요가 없다.

청와대 앞길 개방 이후 1인 시위와 소규모 집회 중 상당수는 청와대 쪽으로 옮겨갔다. 종로경찰서에 따르면 지난 5월 27건이던 청와대 앞 집회는 지난달에는 86건으로 증가했다. 경찰 관계자는 “‘평화집회’의 기조가 강했던 촛불집회 때는 대규모여도 관리가 어렵지 않았는데 최근에는 다양해진 주최자들이 크고 작은 시위를 많이 해서 질서 유지가 더 힘들다”고 말했다.

광화문 인근 직장에 다니는 시민들 사이에서는 불만도 제기되고 있다. 서울 혜화동에서 시청역 부근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인 박모(48)씨는 “광화문 광장 일대가 행사나 집회 때문에 평일에도 수시로 차량 통행이 제한된다. 집회를 하더라도 통행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청와대 인근의 청운·효자동 주민들은 17일 “집회 소음으로 정상적인 일상 생활이 불가능하다”며 청와대·국회·경찰청 등에 탄원서를 냈다.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는 "정권이 바뀐 뒤 광장 정치가 현실 정치에 '먹힐 수 있다'는 기대감이 높아져 각양각색의 집회가 만발하고 있다.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도심 집회가 누군가의 정상적인 생활을 방해할 정도로 일상화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집회 참가자들 스스로 '시민적 양식'의 차원에서 절제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홍상지·하준호 기자 hong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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