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뺨 맞고 성행위 연기 강요받아"…영화계 내 폭력 근절 목소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영화감독 김기덕 사건 공동대책위원회의 참여단체 회원들이 8일 "예술을 무기로 폭력을 합리화하지 마라"는 등의 내용을 쓴 피켓을 들고 있다. 이들은 영화계 내의 성폭력과 인권침해가 관행적으로 일어났다고 지적했다. [연합뉴스]

영화감독 김기덕 사건 공동대책위원회의 참여단체 회원들이 8일 "예술을 무기로 폭력을 합리화하지 마라"는 등의 내용을 쓴 피켓을 들고 있다. 이들은 영화계 내의 성폭력과 인권침해가 관행적으로 일어났다고 지적했다. [연합뉴스]

영화계 내 성폭력, 인권침해에 대한 문제제기가 본격화하고 있다. 8일 오전 10여개의 영화계ㆍ여성계ㆍ법조계 단체가 변호사·법률자문 교수 등 13명과 함께 ‘그것은 연출이 아니라 폭력이다’라는 제목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영화감독 김기덕 사건 공동대책위원회’ 가 주최한 이날 기자회견에는 여성영화인모임,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아동인권센터,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등이 참석했다.

영화감독 김기덕 사건 공동대책위원회 기자회견 #"연출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할 수 없는 폭력" #영진위, 영화인모임 등 광범위한 실태조사 활발

'영화감독 김기덕 사건'은 2013년 영화 ‘뫼비우스’에 캐스팅된 여배우 A씨가 김기덕 감독을 지난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고소한 일이다. 8일 공동대책위는 “A씨가 2013년 3월 촬영 과정에서 김기덕 감독에게 뺨을 수차례 맞았고 시나리오에 없는 성적인 행위를 강요 받았다”고 밝혔다. 정신적 충격으로 촬영에 끝까지 참여하지 못했으며 결국 영화에서 하차했다는 주장이다. 영화는 여배우를 새로 캐스팅해 완성됐고 베니스국제영화제에까지 진출했다. 4년 동안 여러 단체에서 상담을 받아온 A씨는 올 1월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의 영화인신문고에 사례를 올렸다. 이를 계기로 각계 단체와 개인이 모인 공동대책위원회가 구성됐고 검찰 고소로 이어졌다.

촬영 중 강요, 폭행, 모욕, 명예훼손 등으로 여배우에게 고소당한 김기덕 영화감독. [중앙포토]

촬영 중 강요, 폭행, 모욕, 명예훼손 등으로 여배우에게 고소당한 김기덕 영화감독. [중앙포토]

  이에 김기덕 감독은 3일 입장을 내고 “(따귀를 때린 것은) 촬영을 하면서 이 정도 해주면 좋겠다고 실연을 보이는 과정에서 생긴 일로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며 “어떤 경우든 연출자 입장에서 영화의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집중하다 생긴 상황이고 다수의 스태프가 보는 가운데 개인적인 감정은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아직 검찰 조사는 시작되지 않았지만, 영화계를 중심으로 관행을 바로잡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김기덕 감독 사건과 비슷한 사례가 잇따르기 때문이다. 지난해 이른바 ‘남배우 A’ 사건에서는 상대 여배우가 사전 협의한 내용과 달리 촬영 과정에서 성폭력을 당했다며 남배우를 고소했다. 또 최근엔 여배우와 감독 사이에 노출 장면 삭제를 놓고 법적 공방이 일어났다.

8일 기자회견에서 안병호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위원장은 “남배우 A 사건에 이어 이번 김기덕 사건에서도 영화를 만드는 일이 모호하게 인식돼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며 “영화 제작 중 폭행ㆍ강요가 발생해도 영화의 완성도ㆍ작품성 뒤로 가려진다”고 지적했다. 또 박재승 찍는페미 대표는 “왜 여성 배우나 다른 제작진들은 (작품에) 어떤 행위가 나오고 어떻게 연출될지 알지 못한 채 촬영에 들어가야 하는가”라며 “권위적인 제작 환경 때문에 수많은 여성 배우와 여성 영화인들이 당한 성폭력이 감춰졌다”고 주장했다.

잇따라 불거지는 사건으로 성폭력과 인권침해 사례수집이 본격화하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와 여성영화인모임 등은 배우 뿐 아니라 촬영 스태프까지 범위를 넓혀 인권 침해 사례, 특히 성폭력 피해 사례를 들여다보고 있다. ‘영화산업 내 성폭력 실태조사’는 5월 시작해 이달 15일 1차 조사를 마감한다. 여성학 전문가 5인, 영화인 3인이 참여해 설문ㆍ면접 조사를 진행 중이다. 영화진흥위원회 공정환경조성센터의 한인철 팀장은 “본래 300명을 대상으로 시작한 조사인데 최종 600명까지 조사 대상이 늘어나게 됐다”며 “영화계 종사자들의 피해가 예상보다 광범위하고 심각한 것으로 풀이된다”고 전했다.

이 같은 실태조사는 단지 여성 배우와 여성 제작진에 머물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여성영화인모임 관계자는 “성폭력 실태조사로 시작했지만 폭언ㆍ폭행 등의 인권문제까지 다양한 사례가 접수돼 집중 조사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올 1월에는 영화 ‘다른 길이 있다’에 참여한 여성 배우가 자살 기도 장면에서 실감나는 연기를 위해 실제 연탄 가스를 마셨다는 의혹이 제기되며 배우의 인권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기도 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주도하는 실태조사는 이달 중 마무리 되고 다음 달 토론회를 거쳐 구체적 매뉴얼 마련 등 대책이 나올 예정이다. 8일 이명숙 변호사(한국여성아동인권센터 대표)는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피해자 신상털기 같은 2차 피해가 이어진다”며 “한 사건에 연연하지 말고 외국의 영화 제작 현장에서는 배우와 스태프들의 인권을 지키기 위한 어떤 매뉴얼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일련의 성폭력, 인권침해 사례를 계기로 영화계 내의 오래된 피해사례들이 제대로 다뤄질지도 관심사다. 김기덕 사건 공동대책위원회는 8일부터 다음 달 7일까지 영화계 및 문화예술계 성폭력 등 인권침해 신고를 받는 창구를 새로 열었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이미 2009년 여성연예인인권지원센터를 개설했고 상시적으로 사례를 접수해 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여성민우회 관계자는 “많은 상담 사례를 보면 이미 활동하고 있는 여성 연예인 뿐 아니라 지망생들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과 인권침해가 심각한 수준”이라며 “영화ㆍ연예 산업의 특수성이라는 이름에 가려진 뿌리 깊은 문제가 바뀔 때가 됐다”고 강조했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