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류청론|영상의 마술에 홀리지 말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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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지난 5일 하오9시 저녁뉴스를 시청하고자 하는 일단의 사람들이 강남의 한 호텔에 마련된 TV앞으로 모여 들었다.
아마도 서울과 광주·부산 등지에서 동시에 열렸던 이날의 선거유세가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것이 특히 서울의 여의고와 부산의 수영회에서 개최되었던 유세는 같은 장소에서 이전에 대규모 집회를 열었던 타후보들과의 청중수가 비교된다는 점에서 대세를 결정지을 수 있는 한판 승부의 긴박감까지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TV화면을 통해 비쳐진 유세장의 모습은 적어도 시각적인 차원에서는 후보들간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것이었다. 군중의 규모도 대단한 것 같았고,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청중들의 열기와 호응도도 앞서 있었던 타후보들의 유세에 결코 뒤지는것 같지가 않았다. 이러한 유세장의 상황이 그때까지도 마음을 정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곤혹스러움을 가져다주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TV앞에 모여있던 사람들 가운데 한사람이 탄식에 가까운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기 때문이다.『정말 막상막하구만. 결정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데…』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대권주자들은 오늘과 내일, 주말을 이용해 서울과 부산에서 대규모의 군중집회를 가짐으로써 선거 막판에서 기선을 장악하고자 하는것 같다.
그러나 정작 이러한 대규모 군중집회를 통한 여론형성에서 특별히 이익을 보는 편은 아무래도 여당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야당의 바람 작전이 야권의 분열로 제대로 먹혀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TV를 비롯한 중요한 전파매체가 여당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TV를 통한 여론형성은 여당에는 절대적인 프리미엄을 제공해 주는것 같다.
예컨대「노일레·노이만」은 그녀의 『침묵의 나선이론』 에서 『투표행위와 같은 정치적 의견의 표출은 주위의 분위기, 무엇보다 매스미디어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피력한 바 있다. 즉 그녀에 따르면 사람들은 어떤 사회적 쟁점에 대하여 자기 개인의 의견을 가질 때까지는 사회의 일반적 경향이 그 쟁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의해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신의 의견이 우세한 진영에 속한다고 생각할 때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반대로 자신의 의견이 열세한 진영에 속한다고 믿을 때는 소극적인 자세가되어 침묵을 지키게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 과정에서 매스미디어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때 비록 일부를 받고 동원된 청중들이 대종을 이루는 군중집회라고 할지라도 그 규모가 크고 청중의 지지열기가 높을 때 이것을 클로즈업시켜 전달하는 TV의 조작술은 여론형성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하겠다.
아닌게 아니라 최근들어 TV의 이러한 조작술은 매우 두드러지는것 같다. 유열이 낭자한 지역감정의 현장을 집중적으로 보여준다든지, 영상조작을 통해 야당후보의 연설장면이나 군중집회를 격하 내지 왜소화 시킨다든지, 또는 두 김씨의 선거전을 백중지세로 몰고가는 행위등이 그것이다.
돌이켜보면 대가족제도하의 가부장적 권위가 지배적이었던 6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가족구성원의 투표의사는 가장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핵가족 제도하에서는 가족의 어른이 부재하기 때문에 TV를 비롯한 대중매체가 의사결정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고 하겠다. 실제로 서울의 유권자를 대상으로 하여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제각기 다른 후보를 찍기로 했다」는 부부가 28%에 달했고, TV연설을 시창한 뒤「특정후보를 찍기로 작정했다」는 응답이 25%나 되었다.
이제 투표일까지는 불과 4일 밖에 남지 않았다. 어느 누가 무슨 말을 한다해도 「변화」와 「민주화」는 이 시대가 갈구하는 최대의 목표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해야할 사명감이 있는 것이다.
혹시 TV에 의해 조작된 여론이 우리가 반드시 이룩해야할 큰일을 그르치지 않을까 염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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