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세장 청중은 응원단인가|장두성<편집부국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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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나는 좀 당돌한 선임관을 가지고 선거 유세장을 참관했다. 여섯차례의 대소유세를 보고난후 그 선임관은 사실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심증을 굳혔다.
그 선임관이란 추위를 무릅쓰고 후보들 앞에 계속 몰려들고 있는 청중이 운동경기에 나가는 응원단과 비슷한 성향을 과거의 선거때보다 훨씬 더 짙게 띠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 후보, 저 후보의 연설을 들어보고 자신의 표를 누구에게 던질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몰려가기보다 이미 지지해주기로 신념을 굳힌 후보의 위세를 돋보이게 해주기위해 청중수를 늘려주려고 가는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일당을 받고 자신의 정치적 선호와는 전혀 관계없이 동원되는 청중도 크게 보면 같은 범주에 들어간다고 할수 있다.
김포읍에서 본 첫 유세는 이 선입관에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후보가 도착하기 40분전 그곳에 모인「청중」수는 그곳 사람인듯한 17명뿐이었다. 이미 마이크를 통해 요란스런 지원연설이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이들은 전혀 무관심한 표정으로 잡담을 하고 있었다. 곧 진짜 청중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25대의 버스를 타고 멀리 남쪽에서 후보가 동원해온 청중들이었다. 버스 한대에 50명은 탔다고 칠때 청중수는 정확히 1천2백50명에 17명을 보탠 수가 된다.
이윽고 후보가 나타나더니『친애하는 김포읍민 여러분』이라고 서두를 잡았다. 그러나 김포읍민은 17명뿐이었고 이 후보의 연설로 설득될수 있는 대상도 그 정도를 넘지 못했다. 동원된 청중들은 대부분 종교지도자인 후보를 따르는 신자들이었다.
인천에서 있었던 노태우후보, 위세에는 이와 비교가 안될 정도의 많은 청중들이 모였지만 청중의 반응으로 미루어 보면 순수한 지지자와 무관심한 동원청중을 확연히 구획할수 있을 정도로 분명했다.
양김씨의 청중들은 이와는 다른뜻에서 나의 선임관을 확인해주었다. 김대중씨의 여의도 유세때는 미리 와 있던 사람들이『이 광장을 꽉 메워야될텐데…』, 또는『적어도 여기까지는 차야될텐데…』하고 서로 걱정하는 소리를 여러번 들었다.
마찬가지로 김영삼씨의 여의도 유세때는『김대중이가 이걸 보면 가슴이 섬뜩할것』이라는 말을 큰소리로 뗘드는걸 들었다. 그러나 누구하나 그 소리를 탓하려들지 않았고 오히려 당연하다는듯한 표정들이었다. 불행한 일이지만 마산에서 김대중씨의 유세차가 불길에 싸인 다음날 김영삼씨의 유세차가 여수에서 불길에 싸이는 격렬한 행동의 씨앗들은 여의도의 평화로운 유세장에도 뿌려져 있는것 같았다.
한주일을 전후해서 양김씨를 보기위해 여의도 광장에 몰려든 각각 1백만명이 넘는 청중들의 분위기는 다른 김씨의 지지자는 물론 제3의 방관자가 끼어들 틈을 허용하지 않을듯한 열기를 뿜고 있었다.
백기완후보의 보라매공원 유세는 그런 일방적인 지지 열도를 여러배로 확대한 것이었다. 이곳에서는 심지어 책을 팔고, 코피를 파는 행상들까지도 짬 있을 때마다『군사독재끝장내자』등의 구호들을 외쳐대고 있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후보건, 청중이건, 행상이건간에 거의 모두가 이번 선거에 대한 오직 한가지염원으로 일체감을 보이고 있었다.
각후보들 앞으로 몰려드는 이 엄청난 숫자의 청중들이 자기가 원하는 대통령감을 물색하러 다니는 중립적 유권자가 아니고 배타적으로 자기 후보만을 응원하는 파벌적 유권자라는 사실은 실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것 같다.
왜냐하면 이번 선거에서 예상대로 40%에도 못미치는 득표율로 새대통령이 등장할 경우 격심한 패배감을 느낄 사람은 낙선한 후보들 이상으로 지금 광장에 모여들고 있는 수백만명의 지지청중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자기 후보의 패배는 꿈의 좌절, 소망의 좌절로 받아들여지는 방향으로 선거운동이 질주하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집단적 좌절감을 어떻게 해소해 주느냐가 이번 선거의 성패를 측정할 범국민적 척도가 되어야할 것이다.
선거일이 가까와짐에따라 유세장의 분열적 청중 열기는 지금까지 보아온 것보다 훨씬 더 험상궂은 형태로 분출될 것이 확실하다.
그러한 불행한 전망을 진정시켜줄 힘은 이제 그 열기를 노골적으로 부추기고 있는 후보들에게서는 기대할수 없다.
그 힘은 이번 선거가 갖는 정치적 의미를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냉철히 관찰할수 있는 대다수 국민들의 선택에서 나올수 밖에 없다. 야권 후보가 분열된 상태에서 그런 힘이 발휘될 소지는 지극히 좁아져 있지만 이번 선거가 모두의 숙원인 문민화의 첫 관문에 불과하다는 장기적 안목이 선거 후의 범국민적 화합을 위한 공동의 바탕이 되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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