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전영기의 퍼스펙티브

“이 땅에 우리가 필요 없으면 차라리 해외에 팔아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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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한국형 원전 개발 K박사의 절규

지구 종말이 와도 사과나무는 심는다

원전 생태계의 정점인 350명 그룹 #“공들여 쌓은 탑 무참하게 짓밟혀 #원전 종사자를 죄인 만드는 정부” #탈핵론, 과학·사실 아닌 신념·윤리 #원자력은 두렵지만 통제할 수 있어 #신고리 중단하면 삶의 질 나아지나 #시골 바닷가 위치 ‘새울원자력본부’ #철근 부식 막으려 8월말까지 공사해 #원전 사고는 인재 … 지진 발생과 무관

기자가 한국수력원자원 산하 새울원자력본부(본부장 김형섭)를 찾은 건 지난 19일이었다. 한수원의 날치기 이사회가 있은 지 닷새 뒤다. 이사회는 정부 하명(下命)으로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석 달간 중지키로 의결했다. 결정 내용 중 “일시 중단하더라도 원자로 건물의 마지막 기초(3단) 작업만은 수행한다”는 대목이 있었다.

마지막 기초 3단이라-.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꼭 심어야 할 사과나무 같은 걸까. 궁금했다. 신고리 5·6호기 건설 현장이 있는 새울원자력본부를 찾아간 건 이 때문이었다. 서울역에서 2시간 KTX를 타고 울산역에서 내린 뒤 다시 자동차로 1시간을 달렸다. 울산과 부산과 동해가 만나는 시골 바닷가에 새울본부가 펼쳐졌다.

방파제가 삥 둘러선 고즈넉한 어촌 풍경, 축구 경기장 반만 한 넓이에 기초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슬람 사원처럼 생긴 원통형 돔지붕 빌딩이 들어설 예정이다. 신고리 5호기 ‘원자로 격납건물(RCB·Reactor Containment Building)’이다. 핵연료가 타면서 열과 방사능을 발생시키는 곳이 원자로다. 격납건물은 이 원자로에서 새어 나올 수 있는 방사능의 바깥 유출을 차단하고 외부 공격으로부터 원자로를 보호하는 감싸개 역할을 한다.

원자로는 심장, 격납건물은 갈비뼈

지난 19일 신고리 5·6호기 기초공사 현장에서 필자가 철근을 만지고 있다. [사진 새울원자력본부]

지난 19일 신고리 5·6호기 기초공사 현장에서 필자가 철근을 만지고 있다. [사진 새울원자력본부]

원자로는 원전의 심장, 격납건물은 심장을 둘러싼 갈비뼈다. 공정의 30%가 진행된 단계에서 안전 싸움의 승부처는 격납건물이다. 격납건물을 완공한 뒤에는 원자로 안전 설비에 집중해야 한다. 원전 건설은 절대 안전에 도전하는 인간의 기술 투쟁이다. 땅속의 지진에 견뎌야 하고 육상과 해상, 하늘로부터의 재해나 공격을 막아내야 한다.

신고리 5호기 작업은 지하 1·2단을 완성하고 바야흐로 제3단 기초 쌓기에 돌입한 상태였다. 땡볕 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수백 명 건설 기술자의 움직임이 전사처럼 민첩하다. 신고리 5·6호기는 최악의 자연 조건을 상정해 설계됐다. 원전 인근 10㎞ 지점에서 규모 7의 지진이 발생했다고 전제한다. 한국에서 계측된 가장 파괴적인 지진 규모는 5.8이다. 규모 7의 충격을 온전하게 흡수해 원자로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하는 게 기초작업의 목표다. 지진은 강도로 이긴다. 어린아이 손목 두께만 한 철근이 가로세로 엇갈려서 수십 층 차곡차곡 쌓여 올라가고 있었다. 이 철근들 사이사이에 콘크리트가 빡빡하게 스며들어야 3단 기초 작업이 완성되는 것이다.

박성훈 건설소장은 “서울 잠실의 123층 롯데타워는 한국에서 내진 설계가 가장 잘된 상업용 건축물이다. 그런데 신고리 5호기 격납건물의 철근 밀집도는 롯데타워의 20배”라고 설명했다. 들어가는 철근량만 1만t이다. 박 소장은 “대규모 지진이 일어날 때 가장 안전한 피신처는 원전의 격납건물”이라고 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도 진앙지에 가장 근접했던 오나가와 주민들은 원전 건물로 대피했다.

철근 밀집도는 롯데타워의 20배

제3단 기초 다지기는 8월 말까지 공사가 진행된다. 정부는 10월 말까지 손을 놓으라 하지만 그럴 수 없다고 한다. 여기서 멈추면 철근에 녹이 슬어 원전 안전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정치·행정적 안전을 위해 공사 중단 조치가 내려졌지만 과학·기술적 안전을 위해선 공사가 계속된다. ‘공사 중단’도 안전을 위해서요, ‘공사 계속’도 안전을 위해서다. 이 모순은 절대 안전에 관한 두 개의 가치관, 두 세력의 충돌에서 비롯됐다. 첫째 가치관은 ‘핵은 두려우니 존재 자체를 없애 버리자.’ 둘째는 ‘아니다, 원자력은 두려워도 통제할 수 있다.’ 인류의 진취적 문명은 후자의 가치관에서 꽃을 피웠다. 초기 인류가 두려움 때문에 불을 회피했다면 지금의 인류는 없었으리라. 위험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법은 기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완성하는 것이다. 두렵다고 통제를 회피할 순 없다.

한국에서 원전 폐기 즉, 탈핵론에 날개를 달아 준 사건은 2016년 9월 발생한 규모 5.8의 경주 지진이다. 세계 600여 개 원전의 60년 역사에서 대형 사고는 미국의 스리마일(1979년),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1986년), 일본의 후쿠시마(2011년)에서 세 번 일어났는데 모두 지진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 스리마일과 체르노빌 사고는 부품 불량, 관리 미숙, 설계 실패로 벌어진 고장이었다. 후쿠시마 사고 역시 쓰나미가 배경이었지만 방벽 대비, 침수 방지에 소홀해 냉각수가 공급되지 못한 게 원인이었다. 즉, 원전 사고는 인재였던 것이다. 지진으로 건물 붕괴, 교량 파손, 도로 유실은 무수히 있었지만 원자로나 격납빌딩이 붕괴된 적은 없다. ‘지진이 원전 사고를 일으킨다’는 인과(因果) 명제는 상상일 뿐 현실에서 성립하지 않았다. 그만큼 인간의 원전 기술력은 지진과의 싸움에서 한발 앞서 왔다.

지진이 원전 사고의 원인? 상상일 뿐

이런 엄연한 현실을 두고 한국의 원전 안전성 논란이 지진 발생 문제로 탈선한 건 안타깝다. 지질학적으로 동남해안 일대에 깔린 활동성 단층이나 활성 단층은 50만 년에 두 번, 혹은 200만 년에 한 번 지각 변동이 일어났느냐를 기준으로 확정된다고 한다. 이런 단층대에선 지진이 일어날 확률이 높은 만큼 원전을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한국 탈핵론의 주요 논리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진으로 인한 원전 사고는 너무나 치명적(6월 19일 고리원전 폐로 행사)”이라며 이 논리를 그대로 수용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현실 세계에서 지진이 일어날 확률과 원전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을 연결시키는 건 무리다. 애초에 잘 성립하지 않는 관계를 전제로 원전 폐기를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탈핵론은 과학이나 사실보다 신념이나 윤리의 영역으로 분류해야 할 것 같다.

공포의 물질을 통제하는 과정에서 상상할 수 있는 100% 완벽한 안전 조건을 갖춰야 한다는 우려와 열망은 이해할 수 있다. 탈핵론자들이 마지막에 꺼내 드는 “원전의 내진성은 언제나 상대적이다. 그보다 더 큰 지진이 일어나면 치명적이다” “현재의 설계는 예측 가능한 최대의 지진보다 약하다”(양이원영 환경운동연합 처장)는 식의 극한 논리가 인간의 심정을 파고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려와 심정, 신념과 윤리로 국가 정책을 끌고 갈 수는 없다.

정치는 시비를 가리는 게 아니라 실적을 내는 것이다. 결과를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손을 잡는 게 정치다. 막스 베버가 정치에서 신념 윤리보다 책임 윤리를 높이 친 것도 실적의 중요성 때문이다. 급진적인 탈핵 추진, 신고리 5·6호기의 건설 중단으로 5년 뒤 삶의 질이 좋아졌다고 느낄 유권자가 많을까, 악화됐다고 느끼는 유권자가 많을까. 문재인 정부는 지금까지 촛불정치와 적폐청산으로 정의성을 보여줄 만큼 보여줬다. 이제 유능성을 보여줄 차례다. 유능성에서 실패하면 그동안 쌓아 놨던 정의성도 순식간에 잊히게 될 것이다.

신념과 윤리로 정책 결정해선 곤란

울주 원전 여행을 하고 닷새가 지난 24일. 정부는 신고리 5·6호기 영구 중단 여부를 결정할 공론화위원회 구성을 발표했다. 원자력 전문가는 한 명도 없고 위원장은 진보 색깔이 뚜렷하다. 청와대·정부·집권당과 환경단체들의 반원전 기류가 위원회를 끌고 갈 것은 불 보듯 뻔해 보였다. 이날 밤 내 휴대전화엔 30여 년 전 땀과 눈물과 헌신으로 ‘한국형 원자로’ 개발에 참여해 최고 엔지니어 반열에 오른 K박사의 문자가 들어왔다. 그는 아직도 원자력 관련 공기업에 근무하는 현역인데 600조원에 이르는 세계 원전 시장을 누비며 달러를 벌어들이고 있다.

K박사는 이렇게 썼다. “정부가 모든 원자력 종사자를 죄인으로 만들고 있네요. 이렇게 무시당할 바엔 차라리 저희를 해외에 매각하라고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여기서 ‘저희’란 한국형 원전 시스템을 독자 설계하고 원전에 문제가 생기면 현장에 나가 해결하는 엔지니어 공동체다. 이 공동체는 한전, 한수원, 한국원자력연구원 등 관련 기관·업계에 두루 포진해 있다. 해외에 원전을 수출할 때는 해당 국가에 상주하며 그 나라 엔지니어를 교육·양성하는 미션을 수행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원전 산업 생태계의 정점에 있는 전문가 그룹인데 350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 그룹은 태생부터 미국의 기술 패권과 싸우고 일본·러시아와 경쟁했다. 애국심과 자주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다. 조국이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상황이 그들을 충격과 당혹 속으로 몰아넣었다. ‘차라리 우리를 외국에 팔아라’는 토로가 나온 이유다. 현재 한국형 원전 도입에 가장 열성적인 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신흥 원전부국들이다. 이런 나라들은 풍족한 오일 달러를 무기로 한국의 원전 두뇌들을 언제든지 집단 구매할 준비가 돼 있다.

원전 부품 300만 개의 국산화율 95%

한국형 원자로 개발팀의 리더였던 이병령(70) 박사는 “원전 기술은 철저하게 사람 의존적이다. 사람이 사라지면 기술도 없어진다. 이들이 팀을 이뤄 이 나라 저 나라로 움직이면 한국의 원전 생태계는 급속도로 붕괴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통상 한국형 원전 시스템의 부품 수는 300만 개로 본다. 핵연료, 원자로, 증기발생기 같은 핵심 시설을 포함해 국산화율이 95%다. 원전산업 생태계의 정점에 있는 350명 그룹이 해체되면 크고 작은 관련 제조업체들이 연쇄적으로 무너지는 건 시간 문제다. 한국 제조업의 척추 역할을 해 온 특정 산업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초토화, 공동화되어도 괜찮은 것일까. K박사의 절규는 이어진다. “이 정권에서 공들여 쌓아 올린 탑이 무참히 짓밟히고 있다. 절망적이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