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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국의 퍼스펙티브

미리 답 정해놓았다면 공론화는 왜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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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원전 건설 중단 공론화 

부끄러운 기억이다. 농촌 마을에도 집집이 자동차가 생긴다는 말을 굳게 믿었다. 내가 좋아하는 만화가가 멋진 미래를 그림으로 보여 줬다. 정의의 사도인 홍길동을 그린 분이다. 선생님들이 홍보책자를 나눠 줬다. 아이들은 만화 그림을 서로 가지려고 했다.

충분한 자료 숙의하는 공론화 #대의 민주주의 한계 보완할 대안 #공론화위 역할 논란은 무의미 #결정 보고하면 집행은 정부 몫 #공정하고 투명한 공론화로 #국민 전체 공감하게 진행해야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 특별선언. 헌법 개정 국민투표는 투표율 91.9%에 찬성 91.5%, 압도적 지지로 통과됐다. 북한 선거에서나 봤던 찬성률이다. 얼마나 훌륭한 헌법이길래 이런 엄청난 지지를 끌어냈을까.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는 선거를 없앤 헌법이다. 간선 대통령은 헌법 기능까지 정지할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가졌다. 영구 집권이 가능하도록 했다. 국회 의석 3분의 1을 사실상 대통령이 지명했다. 10·26의 비극을 가져온 헌법이다. 그런데도 나는 할머니께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전달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 정당 활동이 중단됐다. 집회 시위도 금지됐다. 신문·방송은 사전 검열을 받아야 했다. 선생님들은 정부 입장을 어린이들에게 주입했다. 인기 만화가의 삽화를 넣은 유신 홍보물이 무제한 뿌려졌다. 아이들은 유신 찬양 노래로 고무줄놀이를 했다.

정당은 손발이 묶였다. 언론의 입은 봉쇄됐다.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할 공무원, 심지어 교사들을 홍보 일꾼으로 동원했다. 순진한 어린아이들마저 독재자의 사기극에 이용됐다. 삼권 분립은 말만 남았다. 그렇게 유신이 시작됐다.

국민투표는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그러나 권력자가 틀을 어떻게 짜느냐에 따라 내용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국민투표는 독재자가 민주주의로 화장하는 데 주로 이용됐다. 권력자의 힘이 여론을 조작했기 때문이다.

민주화가 정착되고 정권 교체를 반복해도 그런 우려는 사라지지 않는다. 기득권 세력이 쌓은 적폐가 많을수록 도덕적 부담이 없다. 독주할 명분이 충분하다. 스스로 절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함정이다. 적폐의 더미를 빨리 치우려는 조급성보다 차근차근 절차를 챙겨야 하는 이유다. 원전 문제도 그렇다.

정부는 신고리 원전 5, 6호기 건설을 중단하는 문제를 공론조사에 부쳤다. 무엇보다 소통하려는 노력이 반갑다. 이전 정부의 불통(不通)과 대비돼 참신하다.

그렇지만 따질 것은 따져 봐야 한다. 그 공론조사가 제대로 이뤄질 것인지, 공론화위원회는 그 권한에 맞게 공정하고 투명하게 조사할 것인지. 또 공론조사가 5, 6호기에 한정된 것인지, 장기적인 국가 에너지 정책을 결정하는 것인지도. 이미 진행 중인 공사를 중단한 절차는 합당한지도 짚어 봐야 한다.

공론화는 필요하다

대의제와 다수결만으로 해결이 안 되는 일이 있다. 정치권이 합의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사업을 마무리할 때까지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쳐 엄청난 사회적 갈등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일이 허다하다. 공론(公論)에 부치는 것은 좋은 대안이다. 돌아가는 것이 빨리 가는 방법일 때가 많다.

공론조사는 여론조사와 다르다. 여론조사는 한계가 많다. 잘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같은 가치로 평가된다. 대안으로 충분한 자료와 토론·숙고할 시간을 주고 생각의 변화를 확인하는 것이 공론조사다. 한국에서는 ‘참여’를 강조한 노무현 정부 때 도입됐다. 서울외곽순환도로 사패산 터널과 경부고속철도 천성산 터널 공사 때 먼저 시도됐지만 ‘공사 강행을 위한 요식행위’라고 거부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2005년 8·31 부동산 대책 수립, 노 대통령 임기 말 ‘원포인트 개헌’ 때도 공론조사를 했다.

2013년 10월 구성된 사용후핵연료공론화위원회는 권고안을 냈지만 수용되지 않아 현 정부가 다시 공론화를 추진하겠다고 한다. 뚜렷한 성과는 거두지 못한 셈이다. 아직은 진행하는 방법도 미숙하고 신뢰를 얻지 못한 탓이다.

답이 정해진 공론화는 무의미

공론은 일방적 홍보가 아니다. 쌍방향 소통이다. 그 절차를 통해 국론을 모으고 이해를 높일 수 있다는 기대가 있다. 설계가 공정하고 투명해야 한다. 미리 정해진 정답이 있으면 무의미하다.

인적 구성이 중요하다. 공론화위원회는 8월 중 2만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고, 9월 초 350명을 선발해 공론조사를 한다고 한다. 이들이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는지 논란이 없어야 한다. 공론화는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이다. 선발된 시민뿐 아니라 국민 전체, 이해관계자들까지 설득하고 공감할 수 있게 진행해야 한다.

권한이 있으면 책임이 따른다

정부와 공론화위원회가 서로 책임을 떠민다. 홍남기 국무조정실장은 “배심원단의 결정을 그대로 정부가 정책으로 수용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공론화위원회 측은 자신들은 보고서만 내고 정부가 결정할 것이라고 부인했다. 이런 핑퐁 논란은 사실 별 의미가 없다. 공론화위원회는 어떻게든 논의 결과를 보고서에 담아 정부로 보내게 된다. 그대로 집행하느냐 여부는 정부 몫이다.

권한에는 책임이 따른다. 원전 공사를 중단하는 결정은 어마어마한 파장이 따른다. 매몰비용만 조 단위다. 영구 중단할 경우 이미 집행한 공사비 1조6000억원과 보상비용까지 총 2조6000억원이 소요될 것이라고 정부는 추산했다. 원자력 업계에서는 10조원이 넘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신고리 원전 5, 6호기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에너지 정책의 큰 방향이 바뀐다. 앞으로 에너지 환경이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 역사적 책임을 떠안아야 한다. 이 때문에 정부가 공론화를 내세워 책임을 회피하려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공론조사 결과는 국민의 뜻인가

헌법 제72조는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 안위에 관한 중요 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법률 이상의 효력을 가진다.

그렇지만 공론조사가 국민투표를 대신할 수는 없다. 공론화위원회는 국무총리 훈령으로 구성됐다. 법률로 만든 기구도 아니다. 그렇다면 행정부의 권한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공론화위원회의 자문을 참고로 정부가 결정하는 것이다.

이미 진행 중인 공사를 중단시킨 것은 누구 책임일까. 2조원이 넘는 매몰비용은 누가 물어야 할까.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국회 청문회에서 “저희들은 권고를 했고, 한수원 이사회에서 모든 것이 결정됐기 때문에 일시 중단에 따른 손해배상은 한수원이 책임져야 된다”고 말했다. 일시 중단에 따른 1000억원은 한수원이 물 것이란 것이다.

그러면 산업부가 2조6000억원이라고 추정하는 매몰비용은 누가 물 것인가. 백 장관은 “정부가 책임질 것이 있으면 모든 법적 절차와 보상 문제를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국민 세금으로 메우겠다는 이야기인가. 산업부는 대통령 지시를 받아 바로 전달했다. 고민도 논의도 아무 절차도 없었다.

원자력안전법과 전기사업법은 ‘허가 절차나 기준 또는 안전에 문제가 있을 때’ 원전 건설을 중단할 수 있도록 했다. 이번 결정은 그와는 관계없다. 일방적인 권한 남용 논란이 나오는 이유다.

대통령중심제에서 권력 3부는 엄격하게 분리돼 있다. 행정명령으로 법률을 대체하는 것은 편법이다. 삼권 분립을 위협하는 일이다. 공론화위원회가 결정권을 가진 것처럼 이야기하는 게 국회와 같은 역할을 기대하는 것이라면 위험한 발상이다. 이런 조치가 문재인 정부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정권이 교체돼 보수정부가 브레이크 없이 독주하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건가.

민주정부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임명된 권력’은 ‘선출된 권력’에 복종하게 돼 있다. 대통령뿐 아니라 국회의원도 선출됐다. 임명된 공론화위원회는 정부의 시한부 자문기구일 뿐이다.

정해 놓은 답이 정말 없을까

백 장관은 지난달 24일 “산업부는 공론화 과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예단을 가지고 추진하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답이 정해져 있다는 의심을 떨치기 어렵다. 백 장관은 탈원전을 해도 전기요금 인상이 없다는 ‘삼척동자’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지난달 31일 당정회의는 ‘탈원전을 해도 전기요금 폭탄은 없다’ ‘장기적인 전력 수급에도 이상이 없다’고 강조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6월 19일 고리 1호기 영구 정지 선포식에서 “원전 중심의 발전정책을 폐기하고 탈핵시대로 가겠다. 신규 원전 건설계획은 전면 백지화하겠다”고 선언했다. 문 대통령은 2012년 대선 출마 선언을 하면서부터 “추가 원전 건설을 중단하고 수명이 다 된 원전은 가동을 중지시키겠다”고 밝혔다. 그래도 공정한 공론화가 가능할까.

산업부뿐만이 아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만드는 홍보잡지 『공감』에도 탈원전 홍보 특집이 실렸다. 한수원은 홍보를 중단했다. 공정성을 해친다면서. 청와대는 공론화의 공정성을 비판하는 야당을 공격했다.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으니 이미 얻어 놓은 것이라고 전제하면 토론할 수 없다.

공론화는 선심이 아니다.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는 성숙한 토론문화와 결과 승복이 전제되지 않으면 공론화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반대 토론 자체를 악마로 몰았던 유신 시절은 닮지 않아야 한다. 국가 운명을 좌우할 중대 현안을 미리 예단하고 싶지 않다. 그럴수록 공정하고 투명한 공론화가 가능할지 걱정이 앞선다.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