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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출가스 규제 도입 너무 빨라 … 산업 경쟁력까지 깎아먹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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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국내 5개 완성차 중 르노삼성차는 올해 유일하게 플러스 성장한 업체다. 올 상반기에 13만5895대를 판매해 지난해 상반기(12만3930대) 대비 판매량이 9.7% 늘었다. 7일 박동훈(사진) 르노삼성차 사장을 만나 한국 자동차 산업의 경쟁력에 대해 물었다.

박동훈 르노삼성 사장의 하소연 #일본은 3년이나 연기했는데 #한국 9월 시행, 신차 출시 애먹어 #미국의 ‘잃어버린 10년’ 닮을 우려

박 사장은 “1989년 자동차 업계에 처음 발을 디딘 이래 이번 6월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내수 시장이 워낙 침체해서다. 그는 “구매 계약이 늘려면 전시장 방문자가 많아야 하는데 올해 방문자 수가 크게 줄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정말 하루도 거르지 않고 대책 회의를 한 것 같다”고 말했다.

“5개사 중 실적이 가장 좋다”고 언급하자 박 사장은 “규모가 큰 형님들(현대·기아차)이 비바람에 더 많이 흔들렸고, 우리는 덩치가 작아서 덜 힘든 것일 뿐이다. 국산차 전체가 위기”라고 진단했다. 최고경영자(CEO)가 본 한국 자동차 산업의 위기 원인은 무엇일까. 박 사장은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하나를 꼽으라면 규제의 ‘도입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배출가스 규제가 대표적이다. 유엔(UN) 유럽경제위원회는 배출가스 시험 방식을 강화한 ‘국제표준시험법(WLTP)’을 도입하기로 했다. 현재 유럽에서 배출가스를 측정하는 규정(NEDC)보다 주행 상황 등 조건을 까다롭게 설정하고 배기가스를 측정한다. 이를 도입하는 내용을 포함한 대기환경보전법 시행규칙 개정안을 한국 환경부가 지난달 29일 입법예고했다. 이 기준을 충족하려면 요즘 르노삼성차 판매를 이끌고 있는 ‘효자 모델’인 중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QM6를 뜯어고쳐야 한다. 문제는 이게 부분 변경처럼 단순한 작업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질소산화물 후처리장치 등 배출가스 저감장치를 달아야 하는데, 이 과정은 엔진룸부터 다시 설계해야 하는 ‘대 수술’이라는 게 박 사장의 설명이다. 그는 “이런 환경 규제가 과도하다거나 도입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규제를 충족할 시간을 좀 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이 당장 9월부터 이 규제를 도입하는 것에 비해, 일본은 도입 시점을 3년 연기했고, 미국은 아예 도입하지 않기로 했다. 심지어 유럽도 이미 판매한 차량은 2019년 9월까지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했지만, 한국 개정안은 내년 9월까지만 판매를 허용하고 있다.

박 사장은 “올해 내수 시장의 돌파구로 기대하며 6월에 출시하려고 했던 소형차 클리오도 9월 말로 출시를 미뤘고, 미니밴 에스파스 도입도 계속 미뤄지면서 모멘텀을 놓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치열해지는 자동차 산업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자율주행차·전기차 등 신기술 투자가 필수다. 그러나 르노삼성의 경우 한정된 자원을 배기가스 규제 관련 기술에 투입하다보니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박 사장은 “개인적으로 자동차 최강국이었던 미국이 10여년 사이에 쪼그라든 이유 중 하나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환경규제가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며 “갑작스러운 규제 강화로 재원·인력을 비효율적으로 배분할 수밖에 없었던 미국 사례를 우리도 참조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문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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