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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모르모트’는 죄악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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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양영유
양영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양영유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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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정부 때인 1998년 10월 교육부가 새 대입안을 내놨다. 당시 중3이 치를 2002학년도 대입부터 당구만 잘 쳐도 대학에 갈 수 있도록 특기와 적성 중심으로 뽑겠다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이해찬 교육부 장관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웬걸, 3년 뒤 수능은 무지막지하게 어려웠다. “우리가 입시 ‘모르모트’냐. 속았다.” 학생들은 분노했다. 하향 학력으로 낙인찍힌 ‘이해찬 세대’의 비극이었다.

동물실험용으로 쓰이는 모르모트(marmotte)가 신성한 교육에 비유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햄스터와 비슷한 모르모트는 원래 기니피그(Guinea pig)라고도 불린다. 크기는 20~25cm로 온순하다. 남미에서는 식용, 미국과 유럽에서는 애완용으로 길렀다. 사람처럼 비타민C 합성 능력이 없는 데다 면역체계도 비슷해 실험동물로 많이 활용된다. 앨빈 토플러도 입시 모르모트가 된 우리 학생들을 걱정한 적이 있다. “하루 15시간 이상을 미래에 필요하지도 않은 지식을 배우기 위해 학교와 학원에서 허비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아이들이 입시 지옥에 내몰린 걸 꼬집은 것이다.

사실 입시 흑역사를 보면 숨이 막힌다. 박정희 정부 때 69학번은 대입을 넉 달 앞두고 전 과목 예비고사 날벼락을 맞았다. 전두환 정부 때 81학번은 고3 여름방학에 본고사가 없어져 우왕좌왕했다. 김영삼 정부 때 재수한 94학번은 마지막 학력고사와 수능과 본고사를 모두 치른 비운의 주인공이 됐다. 노무현 정부 시절엔 수능·내신·논술의 ‘죽음의 트라이앵글’이 학생들을 괴롭혔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선 거기에 학생부종합전형(비교과·자기소개서·면접)까지 더해져 ‘죽음의 헥사곤(Hexagon)’이 됐다.

문재인 정부는 사교육 절감과 입시 간소화란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며 메가톤급 실험을 준비 중이다. 월드컵 4강 정기를 받은 2002년생 중3이 대상이다. 이들 46만 명이 고3이 되면 수능을 절대평가로 바꾸고, 내신도 그리 하겠다는 거다. 변별력과 입시의 투명성·객관성을 어찌하겠다는 것인지 깜깜이다. 게다가 외고와 자사고도 없애겠다고 해 중3 교실은 대혼란이다.

그런 와중에 어제서야 교육 공약을 주도했던 김상곤 전 경기도교육감이 교육부 장관 후보자에 지명됐다. 그가 학생·학부모들의 불안을 깔끔히 정리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한 가지만 명심하면 된다. 학생을 울리는 일방적 입시 모르모트는 죄악이란 걸. 그걸 잊는다면 내신 전쟁이 벌어졌던 2005년처럼 학생들이 거리로 나설지도 모른다.

양영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