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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 물려줬더니 모른 채, 뿔난 부모 “부양료 내놔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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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4호 07면

[탐사기획] 혈연이 해체된다 <중> 늘어나는 부양료 청구 소송

일러스트 강일구

일러스트 강일구

부산에 사는 김모(91)씨는 지난해 장남(68)에게 부양료를 내라며 소송을 냈다. 십수 년 전 부산 중심가에 있는 토지와 건물을 증여해 줬는데도 자신의 부양을 다른 형제에게 맡겨 놓고 신경 쓰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장남은 빚이 많다는 점을 들어 난색을 표했다. 심리를 담당한 부산가정법원 가사7단독은 매달 50만원씩 부양료를 아버지에게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재판부는 “김씨가 자신의 재산 상당 부분을 장남에게 증여해 준 탓에 경제적으로 궁핍해진 것으로 보인다”며 이유를 설명했다.

부양료 심판 지난해 270건 접수 #법정에선 서로 쳐다보지도 않아 #자녀들 거부 이유 “성장 과정 불화” #양육 나 몰라라 했던 몰염치 부모도

노부모가 자신을 부양하라며 성인이 된 자녀를 법정으로 불러내는 일이 늘고 있다. 대법원에 따르면 2006년 152건이었던 부양료 심판 청구 건수는 지난해 270건으로 늘었다. 천륜(天倫)으로까지 불리는 부모자식 간 인연을 끊더라도 자녀에게 경제적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부모들이 그만큼 늘었다는 얘기다. 이미정 부산가정법원 공보판사는 “법정에서 양측으로 갈라져 앉은 부모와 자녀들은 서로 얘기할 때조차 앞자리에 앉은 판사만 쳐다보고 말한다. 눈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이란 얘기다. 부모는 자신이 당연히 부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녀는 해준 게 뭐가 있냐고 항변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중앙SUNDAY가 서울·부산가정법원 등에서 최근 1년여간 선고된 부양료 심판 결정문 43건을 분석한 결과 소송을 낸 부모들의 평균 나이는 75.9세였다. 연금 외에는 정기 소득이 없는 부모가 92.5%로 다수였으며 평균 월수입은 39만여원이었다. 부모 중 39.5%는 자녀에게 일부라도 재산을 증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평균 자녀수는 3.25명이었다. 하지만 자녀들과 같이 사는 경우는 30.3%에 그쳤다. 소송 승소율은 62.8%에 그쳤다. 승소한 경우 자녀들로부터 받는 부양료 액수는 월평균 69만여원으로 집계됐다.

연금 소득뿐인 부모 소송이 92%

승소율도 높지 않은데 부모들은 왜 금쪽처럼 키웠던 자녀들을 상대로 소송까지 냈을까. 경제적 어려움이 1차적 원인이다. 하지만 이면엔 자신의 노고를 알아주지 않는 자녀에 대한 섭섭함과 자녀 양육으로 노후 대비에 소홀했던 것에 대한 후회의 감정이 더 크다는 지적이 많다. 우병창 숙명여대 법학과 교수는 “예전엔 부모가 자식을 상대로 무슨 소송을 내느냐는 인식이 많았다. 하지만 요즘엔 피 튀기게 싸우더라도 돈을 받아내겠다는 뿔난 부모들이 많아졌다.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산도 나눠줬는데 늙고 병든 후엔 도와주지 않는 것에 한이 맺혀 소송을 내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부모 부양에 대한 인식 변화도 원인이다. 통계청의 2016년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2008년 38%였던 부모자녀 동거 비율은 지난해 29.2%로 낮아졌다. 부모의 노후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비율은 11.9%에서 18.6%로 높아졌다. 가정법원 판사 출신인 이현곤 변호사는 “지금 70~80대는 장남이 재산을 물려받고 부양도 전담했던 세대다. 하지만 자식 세대들은 그렇지 않다 보니 세대 간 가치 충돌이 생긴다. 장남이 재산을 물려받고 차남이 부모를 부양할 경우 차남에게 미안해서라도 소송을 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물려준 재산 환수에 나서기도

일부 부모는 부양료 청구를 넘어 물려준 재산 환수에 나서기도 한다. 3남3녀를 둔 박모씨가 그렇다. 박씨는 1998년 남편 사망 당시 상속재산이었던 경기도 소재 7870㎡(2380여 평) 부동산에 대한 자신의 상속지분을 전부 포기하고 장남에게 몰아줬다. 전 재산을 물려주면 평생 정성껏 모시겠다는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후 15년간 박씨는 장남 소유 주택에 살며 매달 40만원가량의 생활비를 받았다. 하지만 2013년 장남이 박씨가 살던 집을 포함한 상속재산을 총 28억여원에 다른 사람에게 팔면서 문제가 생겼다. 박씨가 살 집을 구해주지 않고 큰딸 집으로 옮기게 하는 동시에 생활비 지급도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박씨는 지난해 장남을 상대로 부당이득금 반환 소송을 냈다. 장남은 “상속재산은 어머니와 관계없이 아버지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라 항변했다. 하지만 수원지법 성남지원 민사2부는 지난 1월 “장남은 박씨에게 상속지분에 해당하는 3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박씨가 상속재산 지분을 전부 포기하고 장남에게 준 것은 향후 여생 동안 적절히 부양해준다는 조건에 따른 것이라 봐야 한다. 이를 어긴 만큼 계약은 해제됐다”고 설명했다.

박씨는 상속재산 지분을 포기했다는 명확한 근거가 있어 승소했지만 다른 부모들의 경우 승소하기가 쉽지 않다. 부양을 조건으로 재산을 물려줬다는 명시적인 근거를 남겨 놓은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가사 전문 방효석 변호사는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아파트 한 채가 전 재산이었던 중산층 부모가 자녀 유학·결혼 비용으로 이를 날린 뒤 제대로 부양받지 못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일이 많다. 하지만 부양을 조건으로 재산을 물려준다는 계약서를 쓰지 않는 한 한 번 물려준 재산을 되찾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자녀들도 할 말은 있다. 본지 조사에서 부양을 거부한 이유 중 가장 많았던 답변은 “성장 과정에서의 불화”(32.6%), “부모가 이혼한 뒤 양육에 소홀했다”(23.3%) 등이다. 1남2녀를 둔 A씨(73)가 그 예다. A씨는 B씨와 73년 결혼했지만 다른 여성과 동거하는 등 불륜을 저질렀다. 자녀들은 자신의 어머니를 버린 A씨에 대한 부양을 거부했다. A씨는 2015년에 자녀들을 상대로 부양료 심판을 청구했다. 재판부는 “A씨의 수입이 월 30만~40만원가량의 국민연금밖에 없고 건강이 좋지 않다. 부모와 자녀 사이 부양의무를 감안하면 자녀별로 각각 20만~30만원가량의 부양료를 지급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정용신 서울가정법원 공보판사는 “실무를 하다 보면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부모도 나온다. 본인은 젊은 시절 지나치게 술을 마시고 가정폭력을 행사하거나, 외도로 가족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줬으면서도 세월이 지나자 당당하게 자식이니까 부양하라고 요구하는 경우다. 자녀들도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해 부양료를 지급하기 싫다고 거부해 법원까지 오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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