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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남대문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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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박정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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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뿔·개뿔은 알았지만 고양이 뿔은 생소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남대문시장’ 전시(7월 2일까지)를 둘러보면서 배운 것 가운데 하나다. ‘고양이 뿔을 빼놓고는 다 있다’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세상의 거의 모든 물건이 있다는 뜻이다. 하루 유동인구 40만 명, 그중 외국인이 1만여 명이다. 거래되는 상품은 1700여 종, 말 그대로 만물상이다. 백화점 중의 백화점이다.

남대문시장은 올해로 개장 120년을 맞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도시 상설시장이다. 요즘 말하는 재래시장의 원형이 됐다. 1897년 숭례문 안쪽에 있는 선혜청(조선 중기 세금으로 걷은 쌀과 포목 등을 관리한 관청) 자리에 설치한 창내장이 그 시작이다. 마침 1897년은 고종 임금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황제로 즉위한 해. 정치·경제 모두 조선의 새로운 출발을 알린 셈이다.

전시장은 한국 시장경제 발달사의 축약판이다.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남대문시장에서 주로 사고팔았던 상품 120개를 모았다. 쌀·콩에서 시작해 도자기·수입식품까지 한국인과 함께해 온 물건이 새삼 정겹다. 일제강점기·한국전쟁·산업화·민주화를 거쳐 온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양키시장(미 군수품 취급), 도깨비시장(단속이 뜨면 도망치기), 아바이시장(북한에서 내려온 상인), 남싸롱·남문패션(1980년대 최고 의류시장) 등의 별칭도 생겼다가 사라졌다.

남대문시장은 24시간 움직인다. 자정 무렵 아동복 시장에 불이 환히 켜지고, 새벽 3시엔 꽃 시장이 문을 연다. 주변 직장인의 명소인 갈치골목은 새벽 4시 하루 장사를 준비한다. 오후 5시에는 이동식 노점이 시장 중앙통에 들어서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노점 주인들은 도로에 박힌 못을 보고 자기 자리를 정확히 찾는다. 외부인에겐 어지러워 보이지만 시장의 규칙은 엄하기만 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퇴근길 남대문시장에서 서민들과 막걸리 한잔, 소주 한잔 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김정숙 여사도 남대문시장에서 장을 보고 싶다고 화답했다. 취임 이후 보여준 소탈한 행보를 보면 문 대통령이 실제로 남대문시장을 찾을 날이 멀지 않을 수 있다. 또 다른 파격이 예상된다. 이번 전시장 입구에는 양은밥상에 올려진 돼지머리가 있다. 장사가 잘되기를 비는 상인들의 마음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민이 통치권자에 거는 바람도 다르지 않다. 항산항심(恒産恒心)이라 했다. 배가 두둑해야 마음도 넉넉해진다. 북핵 못지않게 새 대통령이 풀어야 할 숙제다. 그래야 막걸리 맛도 달 것이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