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1 만세’는 잊었다 … ‘지옥’으로 간 백지선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4면

서울 용산구 자택 앞 계단에서 포즈를 취한 아이스하키 대표팀 백지선 감독. 2014년 대표팀을 맡은 그는 시즌이 끝나면 11주간 ‘지옥 훈련’을 실시한다. [김경록 기자]

서울 용산구 자택 앞 계단에서 포즈를 취한 아이스하키 대표팀 백지선 감독. 2014년 대표팀을 맡은 그는 시즌이 끝나면 11주간 ‘지옥 훈련’을 실시한다. [김경록 기자]

삑. 삑. 삐익~. 호각 소리에 맞춰 12명의 선수들이 20m 거리를 왕복으로 전력질주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거스 히딩크(71) 감독이 도입했던 이른바 ‘공포의 삑삑이 훈련’, 셔틀런이다. 체력 측정을 겸한 이 훈련을 한 번이라도 경험한 선수는 “지옥을 맛봤다”며 고개를 내젓는다. 훈련이 진행된 15일 진천선수촌 실내테니스장에선 남자 아이스하키 대표선수들의 거친 숨소리가 끊임 없이 새어나왔다.

3년째 계속되는 ‘11주 체력훈련’ #‘공포의 삑삑이’로 불리는 셔틀런 #한 번만 해도 “지옥 맛봤다” 아우성 #유럽 선수에게 안 밀리는 뚝심 길러 #잇단 3피리어드 역전승 원동력으로 #백지선 “더 강해져라, 평창서 웃자”

‘백상어 하키’ 만든 지옥훈련 20m 셔틀런=일명 공포의 삑삑이 훈련. 2015년 체력훈련 첫 해 대부분 선수들 헛구역질 하는 등 고통 호소. 11주 동안 3차례 실시.

‘백상어 하키’만든 지옥훈련20m 셔틀런=일명 공포의 삑삑이 훈련. 2015년 체력훈련 첫 해 대부분 선수들 헛구역질 하는 등 고통 호소. 11주 동안 3차례 실시.

한국 아이스하키는 지난달 세계선수권대회 디비전1 그룹A(2부리그)에서 2위(3승1연장승1패·승점 11)를 차지하며 사상 처음 월드챔피언십(1부리그) 진출했다. 세계선수권에서 젖먹던 힘까지 쏟아냈던 선수들은 2주간의 달콤한 휴가를 뒤로 하고 다시 훈련을 시작했다. 첫 날부터 강도 높은 훈련이 진행됐다. “이제 막 시차적응을 끝냈는데 또 훈련”이라는 볼멘소리도 있었지만, 대부분 밝은 표정으로 훈련했다.

‘백상어 하키’ 만든 지옥훈련 1RM 테스트(최대 근력 테스트)=지난해 100㎏ 들기 테스트에서 10개 넘게 기록한 선수 한 명도 없어. 올해는 5명이 성공.

‘백상어 하키’만든 지옥훈련1RM 테스트(최대 근력 테스트)=지난해 100㎏ 들기 테스트에서 10개 넘게 기록한 선수 한 명도 없어. 올해는 5명이 성공.

이날 훈련에는 대표선수 27명 중 20명이 참석했다. 맷 달튼(31)·에릭 리건(29) 등 귀화선수들은 빠졌다. 또 지난주 결혼한 김기성(32)과 기초 군사훈련 중인 신상훈(24)·안진휘(26) 등은 나중에 합류한다. 세계선수권에서 다친 김원중(33)·박우상(32·이상 한라)은 깁스를 한 채 훈련을 지켜봤다.

2014년 한국 대표팀 사령탑에 부임한 백지선 감독(50·영어명 짐팩)은 2015년부터 5월 중순이 되면 11주간 집중 체력훈련을 실시한다. 백 감독은 평소 선수들에게 “상어가 피냄새를 맡은 것처럼 상대를 압박하라”고 강조하는데, 이게 ‘백상어(백지선+상어) 하키’의 기본전술이다. 한국은 필드 플레이어 5명 전원이 링크 전 지역을 누비는 이 전술로 강팀들을 연파했다. 강한 체력이 뒷받침 돼야 가능한 전술이며, 이번 훈련이 그 체력을 만드는 과정이다.

‘백상어 하키’ 만든 지옥훈련 웨이스트 벨트 훈련=저항을 준 상태에서 달리기 하면서 자세 교정. 전후-좌우로 움직이는 반복 훈련을 통해 스피드 향상 기대.

‘백상어 하키’만든 지옥훈련웨이스트 벨트 훈련=저항을 준 상태에서 달리기 하면서 자세 교정. 전후-좌우로 움직이는 반복 훈련을 통해 스피드 향상 기대.

지난 2년간의 체력훈련은 단단히 효과를 봤다. 이번 세계선수권에서 한국은 5경기 중 2경기에서 3피리어드 역전승을 거뒀다. 공격수 조민호(30)는 “체력 좋은 유럽 선수들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았고, 오히려

3피리어드까지도 상대를 괴롭혔다. 체력에 자신감이 생기면서 집중력도 좋아졌다”고 말했다. 한국은 내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캐나다(세계 1위), 체코(6위), 스위스(7위)와 격돌한다. 이런 세계 최강팀들과 맞설 때 믿을 구석은 체력 뿐이다.

‘백상어 하키’ 만든 지옥훈련래더 훈련(줄사다리 훈련)=줄사다리를 이용해 민첩성과 밸런스 유지. 스케이트를 탈 때 엉덩이를 밀어주는 동작과 연관.

‘백상어 하키’만든 지옥훈련래더 훈련(줄사다리 훈련)=줄사다리를 이용해 민첩성과 밸런스유지. 스케이트를 탈 때 엉덩이를 밀어주는 동작과 연관.

백지선 감독은 미국과 유럽에서 널리 사용되는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들여와 대표팀 훈련에 접목시켰다. 백 감독은 “나도 선수 시절 벤치프레스를 300파운드(130㎏)씩 들고, 주차장에서 차를 미는 훈련도 했다. 하지만 아이스하키에 필요한 근육과 체력은 따로 있다. 훈련 효과가 빙판 위에서도 그대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훈련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트레이닝 프로그램 비용이 연간 6000여 만원이지만, 이미 투자 이상의 효과를 봤다.

20m 셔틀런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체력왕은 김상욱(29)이었다. 그는 “순간 스피드를 내는데 체력훈련이 큰 도움이 됐다. 체력이 좋아지면서 부상도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신상우(30)는 “첫 해에는 훈련 직후 선수 대부분이 헛구역질을 할 만큼 힘들어 했다. 지금은 유연성과 스피드, 하체 근력 등 모든 부분에서 좋아진 걸 느낀다. 그 전까지 내가 했던 건 아이스하키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선수들 말이 아니라도 백지선 감독이 훈련 프로그램 도입한지 3년이 되면서 체력 향상 효과가 눈에 띈다. 지난해엔 훈련 첫 날 100㎏ 벤치프레스 테스트에서 10번 이상 버틴 선수가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이날은 5명이 100㎏ 바벨을 10번 넘게 들었다. 진강호 트레이너는 “지난 시즌이 워낙 힘들어서 선수들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다. 그런데도 이 정도 하는 건 몇 년간의 훈련으로 다져진 근력이 시즌 이후까지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백지선 감독은 이날 훈련 시작 1시간 전 선수들을 모아놓고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그는 “모두가 우리 성과를 기적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그 자리(월드챔피언십)에 갈 수 있다고 믿었고 많은 시간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가 쌓아온 것을 계속 이어가야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표팀은 다음달 말까지 진천선수촌에서 훈련한 뒤, 7월 태릉선수촌으로 옮겨와 빙판훈련을 병행한다. 이어 7월 말에는 러시아·체코 등지를 돌며 현지의 강팀들을 상대로 실전경험을 쌓을 예정이다. 백 감독의 계획표에는 내년 2월 평창올림픽까지의 일정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백 감독은 “각자 어떻게 하면 더 발전할수 있을지 고민해라. 개인이 강해지면 팀도 강해진다”고 말했다. 백지선호의 도전은 다시 시작됐다.

진천=김원 기자 kim.wo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