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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석사조론 내세워 수교반대 논리 돌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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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1호 23면

한·중 수교의 산파 첸치천을 추모하며

 [로이터=뉴스1]

[로이터=뉴스1]

중국 외교의 별 하나가 사라졌다. 지난 10일 저우언라이(周恩來) 이래 중국 최고의 외교 사령탑으로 꼽혔던 첸치천(錢其琛) 전 부총리가 89세를 일기로 타계한 것이다. 한·중 수교의 산파 역할을 했던 한 주역의 세상 이별에, 특히 그의 회고록 『외교십기(外交十記, 한국어판 제목 ‘열 가지 외교 이야기’)』를 번역하며 그와 나눴던 몇 가지 추억으로 인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 없다. 그의 일생을 우리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살피며 한·중 수교 25주년의 의미를 새기고자 한다.

덩샤오핑 라이벌 천윈 반대에 #대만 외교적 고립, 경제협력 강화 #북 원조차단, 대미 협상력 제고 #네 가지 이점 내세워 설득 시켜 #수교 임박 알리러 불편한 평양행 #“이해한다” 김일성 답변 받아

중국정부 최초의 외교부 대변인

1 2004년 첸치천 전 부총리(오른쪽)가 회고록 『외교십기(外交十記)』의 한국어판 『열 가지 외교 이야기』 출판기념회에서 이홍구 전 국무총리와 함께 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 2004년 첸치천 전 부총리(오른쪽)가 회고록 『외교십기(外交十記)』의 한국어판 『열 가지 외교 이야기』 출판기념회에서 이홍구 전 국무총리와 함께 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중국은 흔히 ‘닫힌 사회’란 말을 듣는다. 그런 중국의 속내에 대해 조금이라도 귀동냥을 하려면 중국 외교부 대변인의 입을 주시해야 한다. 첸치천은 중국 외교부에 대변인 제도를 만든 장본인이자 초대 대변인이었다.

1982년 3월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중·소 관계 개선의 의사를 밝히는 연설을 하자 이에 대한 중국의 반응을 국제 사회에 빨리 내놓으라는 덩샤오핑(鄧小平)의 지시가 계기가 됐다. 당시 외교부 신문국 국장이었던 첸치천이 훗날 외교부장이 된 리자오싱(李肇星)을 영어 통역으로 데리고 나와 특파원들에게 세 문장의 발표문을 읽은 게 그 시작이었다.

첸치천은 외교부장이 된 뒤에도 기자들을 자주 만났다. 다음은 에피소드 한 토막. 중국판 민주화 운동인 천안문(天安門) 사태가 터진 이듬해인 90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 개막식에서 한 미국 기자가 첸치천에게 물었다. “도대체 중국의 봄은 언제 오는가?” 민감한 정치적 질문에 장내엔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첸치천이 답했다. “중국은 땅이 넓어 봄이 오는 때가 지역마다 다르다.” 순간 인민대회당 안에 폭소가 터지며 분위기가 일신됐다.

그는 한국과의 수교가 무르익던 92년 3월에도 기자들의 질문에 재치 있는 답으로 수교 가능성을 시사한 바 있다. 과거 같으면 “한국과 어떤 정부 간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했겠지만 그해엔 “한국과의 수교엔 시간표가 없다”고 말해 중국 대외 방침의 변화를 예고했던 것이다.

돌 하나로 네 마리 새 잡기

2 2008년 개최된 한·중·일 30인회에 중국대표단 단장으로 참석한 첸치천 전 부총리(왼쪽)가 필자와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있다.

2 2008년 개최된 한·중·일 30인회에 중국대표단 단장으로 참석한 첸치천 전 부총리(왼쪽)가 필자와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있다.

첸치천은 1955년 중국 외교부에 들어가 2003년 봄 외교담당 부총리로 은퇴할 때까지 반백 년 가까이 중국 외교의 일선을 누볐다. 특히 88년 외교부장에 오른 뒤부터 2003년까지 15년 세월을 중국 외교의 설계와 지휘에 바쳐 ‘중국 외교의 대부(代父)’란 평을 듣는다. 천안문 사태 이후 경직된 미·중 관계를 복원하고, 97년 홍콩에 이어 99년 마카오의 중국 회귀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의 아시아 관련 최대 업적은 92년 8월 24일의 한·중 수교로 꼽힌다.

당시 중국 입장에서도 한국과의 수교는 어려운 결단이었다. 덩샤오핑이 한국과의 수교는 손해는 없고 이득만 있다는 ‘유익무해론(有益無害論)’을 전개했지만 덩의 라이벌인 천윈(陳云) 등 반대파의 목소리 또한 만만치 않았다. 한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북한에 대한 배신 행위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에 첸치천은 중국 공산당 중앙 외교영도소조 회의에서 “서울과의 수교는 돌 하나로 네 마리의 새를 잡는 것과 같다”는 이른바 일석사조론(一石四鳥論)을 제기했다. 물론 돌 하나는 한국과의 수교를 말한다. 네 마리 새 중 첫 번째는 대만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첸푸(錢復)가 이끄는 대만 외교와 치열한 기(氣)싸움을 벌이던 중국으로선 대만의 역내 최대 맹방인 한국을 대만의 품에서 떼어내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는 한·중 경제협력 강화, 세 번째는 북한의 끝 모를 원조 요구를 차단할 수 있다는 점, 네 번째는 수퍼 301조를 앞세운 미국의 무역 압력에 맞서 협상력을 강화하는 효과를 챙길 수 있다는 점이었다.

수교 에피소드인 순금 열쇠 두 개

3 1992년 8월 24일 이상옥 외무부장관(왼쪽)과 첸치천 중국 외교부장이 베이징에서 역사적인 한?중수교 공동성명서에 서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3 1992년 8월 24일 이상옥 외무부장관(왼쪽)과 첸치천 중국 외교부장이 베이징에서 역사적인 한?중수교 공동성명서에 서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한·중 수교를 위해 많은 이들이 음지에서 뛰었다. 이른바 막후 채널이다. 화교 출신 한의사인 한성호가 고향인 산둥성을 찾아 수교에 도움 될 일을 찾았는가 하면 노태우 대통령과 사돈 관계인 SK의 고위 임원들도 중국 측 고위 인사들과 부단히 접촉했다.

재미있는 건 박철언 당시 체육청소년부 장관과 얽힌 에피소드다. 91년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장관급 회의 참석차 첸치천은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그는 바쁜 일정을 소화하던 중 하루는 밤 11시가 다 돼 박 장관의 방문을 받게 됐다. 박철언은 만남을 위해 첸치천의 동생으로 톈진(天津)시 부시장으로 있던 첸치차오(錢其傲)와의 친분을 내세웠다.

박철언의 방문 요지는 그와 첸치천 간에 한·중 수교 협상을 위한 비밀 라인을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박 장관은 두 개의 순금 열쇠를 꺼냈다. 첸치천과 첸치아오에게 주는 두 개의 크고 작은 순금 열쇠로, 이것으로 한·중 수교의 문을 열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첸치천의 대답은 이제 정부 간 접촉으로 공식 채널이 생겼으니 비밀 라인은 필요없다는 완곡한 거절이었다.

첸치천이 나중에 중국에 돌아가 문제의 열쇠 두 개를 중국인민은행에 보내 감정을 의뢰한 바 모두 순금이었다고 한다. 이 열쇠는 아직도 중국 외교부에 등록돼 보존 중으로 한·중 수교 과정 중의 한 에피소드로 지금도 회자된다.

세상엔 항상 좋은 일만 생기는 게 아니다. 한국과의 수교 협상을 이끌면서 첸치천이 부닥친 난제는 북한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특히 한국과의 수교가 임박했음을 김일성 북한 주석에게 알리러 가는 일은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괴로웠을 평양행 이야기가 그의 회고록 『외교십기』 제5장 ‘서울로 가는 길’에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몹시 불편했을 그의 심정 일단을 짐작하게 한다.

92년 7월 15일 중국 공군 전용기로 평양 순안 비행장에 내렸을 때 첸치천은 과거 흔히 마주치던 환영 인파 대신 김영남 북한 외교부장 혼자 마중 나온 상황에 직면했다. 이후 김일성의 별장으로 가 중국의 한국과의 수교 의사를 전하고 “중국의 결정을 이해한다”는 김일성의 답을 받았다. 그는 그날 회견이 김일성이 중국 대표단과 만난 것 중 가장 짧았을 것이라 술회하고 있다. 물론 관례처럼 따르던 연회도 없었던 것은 불문가지다.

퇴직 전 마지막, 퇴직 후 첫 방문지 모두 한반도

유민(維民) 홍진기 중앙일보 전 회장의 뜻을 기리는 ‘유민 기념 강연회’ 참석차 그가 방한한 2004년 겨울은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다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의 방문은 『외교십기』의 한국어판 출판 기념회 참석을 겸한 것이었다. 그는 홍석현 중앙일보 당시 회장과의 만찬 때 마치 독백처럼 “퇴직하기 전 마지막 방문한 곳이 한반도였는데, 퇴임 후 처음으로 방문한 곳 역시 한반도네요”라는 말을 했다.

첸치천은 2003년 3월 중순 은퇴했다. 2002년 가을 북한이 제2차 북핵 위기를 일으킨 직후였다. 당시 미국이 다자 협상을 주장한 반면 북한은 미국과의 양자 협상을 고집하며 대화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중국이 2월 말 북한으로의 원유 공급을 3일간 중단했다. 이어 3월 8일 첸치천이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과의 회담을 통해 우선적인 북·미·중 3자회담을 이끌어 냈다. 그의 퇴임 전 마지막 임무였다.

한데 퇴직 후 첫 해외 나들이 또한 한국이 될 줄은 몰랐다는 이야기였다. 만찬에선 그의 비범한 기억 또한 화제가 됐다. 91년 청와대를 방문해 노태우 대통령을 만날 때 노 대통령의 옷이 짙은 남색인가를 어떻게 여태 기억하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그는 14세 때부터 공산당 지하 활동을 하면서 익힌 명령이나 지시를 받은 뒤 곧바로 암기하고 문건은 폐기하는 습관이 몸에 밴 탓에 가능했던 일이라며 웃었다.

첸치천은 덩샤오핑의 외교노선인 조용히 힘을 기른다는 도광양회(韜光養晦) 정책의 충실한 집행자였다. 그는 유민 기념 강연회에서 “한·중 관계는 매우 젊어 마치 오전 8시나 9시의 태양처럼 생기발랄하다”며 “역내의 평화와 발전을 위한 한·중의 협력”을 강조했다. 오는 8월 한·중 수교 25주년을 맞는다. 지금은 비록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의 한반도 배치를 둘러싸고 양국이 갈등을 겪고 있지만 이 같은 마찰은 양국 관계의 긴 역사에서 볼 때 잠시에 머무를 것이다. 그의 말처럼 이제 아침을 맞은 한·중 관계는 서로 힘을 모아 가야 할 길이 아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유상철 논설위원
you.sangch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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