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조선시대 사랑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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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박정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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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사랑과 욕망의 노랫말들이 모여 있는 공간입니다. 청소년과 아이들을 인솔하는 부모님과 선생님께서는 각별히 신경 써 주세요’. 전시장 한쪽에 붙은 안내문구다. 이른바 ‘19금 노래’, 주의를 당부하고 있다. 하지만 약간 엄포성이다. 표현 농도가 그리 진하지 않다. ‘사랑 사랑 긴긴 사랑 개천같이 내내 사랑. 구만 리 먼 하늘에 흩어지고 남는 사랑’은 곱고 예쁘기만 하다. ‘사랑이 어떻더냐 둥글더냐 넓적하더냐 길더냐 짧더냐’는 요즘 트로트 유행가 같다.

더러 농염한 대목도 있다. ‘들입다 바드득 안으니 가는 허리 자늑자늑’. 여인네 신체에 대한 묘사가 구체적이다. ‘중놈도 사랑인 양하여 자고 가니 그립다’며 지난밤을 아쉬워한다. 예나 지금이나 사랑은 젊음의 상징일까. ‘진실로 나의 평생 원하기는 말 잘하고 글 잘하고 얼굴 단아하고 잠자리 잘하는 젊은 서방’이라고 고백한다. ‘샛서방 밥을 담다가 놋주걱을 부러뜨렸다’는 며느리를 시어머니가 위로하기도 한다. ‘저 아기 너무 걱정 말아라. 우리도 젊었을 때 많이 꺾어 보았노라’. 시쳇말로 쿨하다. 지금 봐도 낡지 않다.

위의 노래는 한글로 기록한 최초의 가곡 모음집인 『청구영언(靑丘永言)』에 등장한다. 1728년 가객(歌客) 김천택이 구전 노랫말 580수를 일일이 옮겼다. 그 원본이 요즘 서울 용산 국립한글박물관에서 일반에게 처음 공개되고 있다. 이방원의 ‘하여가’, 정몽주의 ‘단심가’ 등 교과서 단골 시조도 많지만 옛사람의 풍류·흥취가 담긴 노래가 정겹다. 세상살이 맨살을 드러낸다. “한때 입으로 불리다가도 저절로 드러나지 않게 돼 후에 연기처럼 사라짐을 면치 못하게 되니 어찌 슬프고 안타깝지 않겠는가”라는 김천택의 열정 덕분에 오늘에 전해지게 됐다.

전시장은 현대적이다. 옛 노랫말을 오늘날 도시 뒷골목 풍경과 겹쳐 놓았다. 『청구영언』 전체를 주제·작가별로 살펴보는 코너도 있다. 먹고, 마시고, 사랑하는 모습이 지금이나 300년 전이나 다름없다는 걸 일러 준다. 삶이 곧 노래요, 노래가 곧 시 아닌가.

나라의 평안을 비는 마음도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선인들은 ‘우리 동방 산하의 견고함이여 태평성대 풍속이 오래도록 이어질 성지(城池)’ ‘임금은 덕을 닦고 신하는 정사를 돌보니 예의 있는 동쪽 나라’가 되기를 희망했다. 요즘으로 따지면 사랑하기 좋고, 아이 낳기 좋은 곳이다. 나라 안팎으로 갈등과 위기의 시절, 철부지 사랑타령을 또 하나 꺼내 본다. ‘아마도 임과 외따로 살라 하면 그건 그리 못하리라’.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