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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개입 댓글부대 수준 넘어…더욱 은밀하고 치밀하게

중앙일보

입력

해킹이 상대국의 주요정보를 몰래 빼내는 사이버첩보전 수준을 뛰어넘고 있다. 지난해 11월 치러진 미국 대선에서 러시아는 훔친 정보를 공개적으로 활용해 미국의 정치판을 흔들어놓고 있다.

2016년 7월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 후보가 공식 확정되자, 러시아는 민주당 전국위원회(DNC) 핵심 인사들이 클린턴 후보를 편향적으로 지지한 정황을 보여주는 이메일 5만여 건을 폭로 전문사이트 ‘위키리크스’에 공개했다. 헌데 위키리크스는 이메일을 한꺼번에 공개하지 않고 릴레이식 폭로전으로 클린턴 후보에 최대한 정치적 타격을 주고자 했다.

힐러리 진영은 연이어 터진 악재를 막지 못해 역전을 허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 www.derf.com.ar 캡처]

힐러리 진영은 연이어 터진 악재를 막지 못해 역전을 허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 www.derf.com.ar 캡처]

위키리크스는 대선 때까지 거의 매일 새로운 자료를 내놓았다. 주요 언론들은 이를 소스 삼아 끊임없이 뉴스를 생산해냈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유된 가짜뉴스의 범람도 한몫했다. 결과적으로 미국 언론들은 러시아의 여론공작에 휘말려 당락에 관계없이 도널드 트럼프 후보를 지원한 셈이 됐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클린턴 후보의 국무장관 시절부터 모스크바에서 일어난 반정부 시위(2011년 12월)나 우크라이나ㆍ시리아 사태를 놓고 사사건건 부딪혀 왔다. 2016년 4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가 푸틴 대통령이 포함된 1,150만 건에 달하는 조세회피처 자료인 ‘파나마 페이퍼스’를 폭로하자, 푸틴 대통령은 미국의 주문으로 작성된 반(反)러 선전전의 일환이라고 비판했다.

미국 정보기관들은 민주당 해킹 논란이 불거지자 수사에 착수, 2016년 10월 해킹의 배후에 러시아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국가안보국(NSA)ㆍ중앙정보국(CIA)ㆍ연방수사국(FBI)ㆍ국토안보부(DHS)가 잇달아 러시아 정보기관이 미국 정당의 전산망에 침투한 구체적 상황과 악성 댓글로 여론을 조작한 정황을 발표했다.

해커들을 추적한 결과, 근원지는 러시아 정보기관인 연방보안국(FSB)과 군사정보국(GRU)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싱크탱크인 브루킹연구소와 같은 외곽 고리를 거점으로 백악관ㆍ국무부 등 정부기관을 종횡무진 누빈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2016년 12월 미 주재 러시아 외교관 35명을 추방하고 기관 2곳을 폐쇄 조치했다.

대선 이후에도 FBI는 수사를 계속한다는 방침이다. FBI 국장은 임기가 보장되어 있어 트럼프 정부에서도 수사를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사진 www.scmp.com 캡처]

FBI는 대선이 끝났지만 수사를 계속한다는 방침이다. FBI 국장은 임기가 보장되어 있어 트럼프 정부에서도 수사를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사진 www.scmp.com 캡처]

2017년 1월 미 국가정보국(DNI)은 보고서를 통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클린턴 민주당 후보에게 타격을 줄 해킹과 여론조작을 지시했다고 확신했다. 덧붙여 러시아가 미국 대선에서의 경험으로 동맹국들의 선거에 개입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해킹 사건의 책임을 묻는 제재는커녕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듯한 모습을 보여왔다. 미국 정보기관 수장들이 줄줄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러시아의 대선개입을 보고하자, 트럼프 대통령도 마지못해 인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 의회는 선거해킹을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초당적 조사에 착수했다.

러시아는 2013년 3월 미셀 오바마 여사와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의 개인정보유출, 같은 해 10월 백악관 정보시스템 해킹, 2015년 8월 미 국방부 이메일시스템 해킹 등 여러 차례 미국에 사이버공격을 가한 의혹을 받아왔다. 그동안 러시아는 ‘꾸며낸 사실’로 일축하고, 그 어떤 의혹에 대해서도 단호히 부인해왔다. 민주주의 근간을 흔드는 사상 초유의 선거해킹 사건에 미국으로선 러시아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조치를 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적대국에 대한 여론조작과 선거개입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금과 같은 초(超)연결사회에서 자국의 이해와 부합하게 만들어진 각종 스토리는 그 진위여부를 가릴 겨를도 없이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문제는 속도다. 스토리의 진위와 맥락이 가려지기도 전에 선거가 끝난다는 것이다.

선거가 끝나면 나눠졌던 진영 간의 불신을 봉합해나가야 하는데 선거해킹이 유언비어와 뒤엉켜 사회균열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처럼 어떻게든 이득을 본 경우라면 해킹이 선거에 영향을 줬다고 인정하기도 어렵다. 자칫 여론 뭇매를 맞고 정권의 정통성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해킹으로 민주적 절차인 선거의 판도를 바꾸려는 시도 자체가 새로운 안보이슈로 떠올랐다.

손영동 한양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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