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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대통령에 닥칠 확실한 시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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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23일 열린 TV토론회에서 대선후보들은 이날의 주제인 외교안보·정치 문제는 제쳐놓고 엉뚱한 이야기로 시간을 허비했다. 국가 존망이 걸린 중대 사안을 이렇듯 경시해도 되나.

취임 두 달 내 정상회의 이어져 #실패 막으려면 당장 준비해야

14일밖에 안 남은 대선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누가 되든 ‘고르디우스의 매듭’ 같은 외교적 난제들을 취임과 동시에 한꺼번에 떠안아야 한다.

주변 4강 중 러시아를 뺀 세 나라 간엔 묵직한 현안이 걸려 있다. 북핵 위기를 함께 헤쳐가야 할 미국과는 미군 주둔비 분담금 및 자유무역협정(FTA)을 두고 실랑이를 해야 한다. 중국과는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갈등, 일본과는 위안부 소녀상 논란을 놓고 다툴 처지다. 이런 난제 4~5개가 한꺼번에, 그것도 막 취임한 대통령에게 쏟아진 것은 전례 없던 일이다.

더 큰 부담은 취임 두 달도 못 되는 7월 7·8일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담에 참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례에 따르면 새 대통령은 미·중·일 정상들과 첫 양자회담을 해야 한다. 주요 정상들을 동시에 만나니 행운 같지만, 독이 될 위험도 크다. 촉박한 시간 탓이다.

정상회담이란 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그저 한두 번 밥 먹고, 두세 번 회의하면 다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국가 지도자들이 이렇듯 웃는 낯으로 헤어지려면 실무자 간의 오랜 물밑작업이 필수다. “길면 6개월, 짧아도 두 달은 돼야 한다”는 게 한 외교부 전 고위 간부의 설명이다.

하지만 지금은 언감생심이다. 지난 박근혜 정부 때는 출범 14일 만에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취임했다. 하지만 다음 정권은 후보자를 마음껏 고를 수 있는 인수 기간이 없는 탓에 외교 수장을 뽑는 데 시간이 더 걸릴 가능성이 크다. 이럴 경우 한 달여 만에 한·미, 한·중, 한·일 정상회담을 한꺼번에 준비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 올 수 있다. 특히 한·미 정상회담의 경우 트럼프 행정부 내 한국 업무 담당 책임자 자리가 아직도 공석이다. 누구를 붙잡고 얘기해야 할지도 모르는 판이다.

그런데도 새 대통령은 가능한 한 빨리 워싱턴으로 날아가 한·미 정상회담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던져질 게 틀림없다. 양국 동맹의 굳건함을 과시하는 한편 이를 통해 여러 현안을 풀고 싶을 게다. 23일 TV토론에서도 “당선되면 한·미 정상회담을 하겠다”는 대선후보의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너무 조급하게 굴면 망치는 법이다. 2001년 3월 김대중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대통령 간 만남은 졸속 정상회담이 얼마나 큰 재앙이 되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당시 김 대통령은 막 취임한 부시에게 하루빨리 햇볕정책을 알리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외교부를 독려해 취임 두 달도 안 된 부시를 워싱턴에서 만난다.

그러니 문제가 없을 수 없었다. 부시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얼마나 증오하는지도 모른 채 그를 만났다. 그런 그에게 북한을 돕자고 역설했으니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결국 이 만남은 사상 최악의 한·미 정상회담으로 막을 내렸다. 미국 언론에 “부시가 김 대통령을 박대했다”는 기사까지 오를 정도였다. 당시 외교통상부 이정빈 장관과 반기문 차관은 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했다.

5일 후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 내 한국 문제 전문가들의 세미나에서는 이런 결론이 내려졌다. “한국 정부가 너무 정상회담을 서둘러 실패를 자초했다”고.

새 대통령은 여기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진보 성향의 후보가 당선되면 워싱턴행에 더 큰 압박감을 느낄 게다. “역시 반미”란 비난을 듣지 않으려 무조건 빨리 가려 할지 모른다. 이 함정에 빠져 준비 없이 갔다간 어떤 낭패를 볼지 모른다.

사상 처음으로 당선과 동시에 대통령에 취임해야 할 대선후보라면 지금부터 캠프 내 참모들을 독려해 정상외교 준비에 착수하는 건 어떨까. 그래야 그나마 조금이라도 물정을 알고 다른 정상들을 상대할 것 아닌가.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