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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프랑스 대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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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프랑스 대통령 선거가 친(親)유럽과 반(反)유럽, 자유무역과 보호주의, 개방주의와 고립주의, 세계주의와 국수주의의 양자 대결로 압축됐다.

프랑스 엘리트 정치인들의 굴욕적 몰락 #아웃사이더 마크롱ㆍ르펜 1ㆍ2위로 결선 진출 #양대 제도권 정당 후보 전원 탈락 이변 #체제와 인물 다 갈아엎자는 ‘데가지즘’ 열풍 #

23일 실시된 대선 1차 투표에서 양 진영을 각각 대표하는 에마뉘엘 마크롱(39) 전 경제장관과 마린 르펜(48) 국민전선(FN) 대표가 1, 2위를 차지하며 내달 7일 실시되는 결선투표에 진출했다. 1958년 출범한 프랑스 제5공화국 사상 비주류 정당 출신 아웃사이더가 나란히 결선에 오른 것은 처음이다. 구체제나 옛 인물의 청산을 의미하는 ‘데가지즘(Degagisme)’이 프랑스 정치의 새로운 사조로 등장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난 30여 년 간 계속된 저성장과 고실업, 또 프랑스의 대외적 영향력과 위상 약화 속에 ‘데가지즘’ 선풍이 몰아치면서 구정치인들이 모두 탈락하고 아웃사이더들이 부상한 것이다.

24일 프랑스 내무부 공식집계(97% 개표 기준)에 따르면 신생 중도정당인 ‘앙 마르슈(En Marcheㆍ전진)’의 마크롱 후보와 FN의 르펜 후보는 각각 23.9%와 21.4%를 득표, 결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기성 제도권 정당을 대표하는 공화당(중도우파)과 사회당(중도좌파)의 프랑수아 피용 후보(전 총리)와 브누아 아몽 후보(전 교육장관)는 19.9%와 6.3%를 각각 기록, 결선 진출이 좌절됐다. 집권당인 사회당의 아몽 후보는 극좌파 포퓰리스트 그룹인 ‘프랑스 앵수미즈(굴복하지 않는 프랑스)’ 의 장 뤼크 멜랑숑 후보(19.6%)에도 크게 밀렸다.

그동안 누적된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지난 60년 가까이 유지돼 온 프랑스 정치지형에 대변혁을 일으키며 프랑스 엘리트 정치인들에게 대굴욕을 안겼다. 그동안 정권을 주고받으며 특권적 지위를 누려온 사회당과 공화당은 당장 6월 총선을 걱정하는 처지가 됐다.

결선 진출이 확정된 뒤 마크롱은 지지자 집회에서 “우리는 1년 만에 프랑스 정치의 얼굴을 바꿨다”면서 “국가주의자들의 위협에 맞서 프랑스와 유럽의 희망의 목소리가 되겠다”고 말했다. 르펜은 프랑스 북부 에넹보몽 지역의 지지자 집회에 참석, “프랑스 국민을 거만한 엘리트들로부터 해방할 때가 왔다”며 “야만적인 세계화로부터 프랑스를 지켜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선 투표 진출에 실패한 피용 전 총리와 아몽 전 장관을 비롯해 공화당과 사회당의 주요 인사들은 극우 세력의 집권을 막아야 한다며 마크롱 장관 지지를 선언했다.

1차 투표 직후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마크롱은 62~64%의 지지를 받아 르펜(36~38%)을 큰 차이로 이길 것으로 예상됐다. 1972년 창당된 FN 의 후보가 결선에 진출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르펜 대표의 아버지인 장마리 르펜 전 대표는 2002년 대선에서 리오넬 조스팽 총리를 꺾고 결선에 진출했지만 2차 투표에서 17.8% 득표에 그쳐 공화당의 자크 시라크 후보(82.2%)에게 참패했다.

이번 선거에서는 이념과 노선이 다른 4명의 후보가 막판까지 오차 범위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여 프랑스 역사상 가장 예측이 힘든 선거로 평가돼 왔다. 최악의 경우 극우와 극좌 포퓰리즘을 대변하는 르펜과 멜랑숑 후보가 나란히 결선에 진출할수 있다는 우려 탓에 유럽 금융시장이 요동치기도 했다. 두 후보 모두 유로존과 유럽연합(EU) 탈퇴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여론조사의 예측대로 마크롱이 결선에서 승리한다면 프랑스의 EU 탈퇴인 ‘프렉시트(Frexit)’ 가능성은 해소된다는 점에서 EU 국가들은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다. 마크롱은 더 강한 유럽, 더 효율적인 유럽을 내세우며 친유럽 노선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르펜에게도 승산이 있다. 마크롱보다 르펜의 핵심지지층이 훨씬 견고하기 때문이다.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 세르주 갈람 교수의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결선에서 르펜 지지자의 90%가 투표하고 마크롱 지지자의 65%가 투표한다고 가정하면 르펜이 50.07%의 득표율로 승리한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결선에서 누가 이기든 대대적인 정계 개편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마크롱이 창당한 ‘앙 마르슈’는 현재 하원 의석을 한 석도 갖고 있지 않고, FN도 하원 의석은 하나 뿐이다. 하지만 마크롱과 르펜의 선전을 감안하면 양당은 총선에서 상당한 돌풍을 일으킬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배명복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bae.myungb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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