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몰’같은 학교 대신 그들만의 ‘스머프 마을’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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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8호 23면

[도시와 건축] 갇힌 학교

100년 전 전화기를 보면 송화기와 수화기가 따로 달린 모습이다. 지금의 스마트폰과 비교해 보면 이게 같은 전화기인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자동차도 네 바퀴 달린 것 빼고는 다 바뀌었다. 비행기도 쌍엽기에서 건물만한 제트기로 변했다. 그런데 100년 전 학교와 지금 학교를 비교해 보면 별로 바뀐 게 없다. 예나 지금이나 큰 운동장에 교사 건물 한 동으로 구성된 모습은 똑같다. 좀 달라진 것이 있다면 과거보다 건물 층수가 높아진 정도이다. 필자가 어려서 다니던 학교의 모습과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아들이 다니는 학교 모습이 거의 같다.

학교에서 12년을 보내야 하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대형 건물이 아니라 마을 같은 공간이다. 전주 한옥마을(위 사진)의 마당이 있는 작은 주택 같은 이미지의 교실이나 미국 미주리대 캠퍼스(아래 사진)처럼 자연을 만날 수 있는 열린 공간이 학교에 필요하다. [중앙포토, 구글]

학교에서 12년을 보내야 하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대형 건물이 아니라 마을 같은 공간이다. 전주 한옥마을(위 사진)의 마당이 있는 작은 주택 같은 이미지의 교실이나 미국 미주리대 캠퍼스(아래 사진)처럼 자연을 만날 수 있는 열린 공간이 학교에 필요하다. [중앙포토, 구글]

다른 물건들은 바뀌는데 왜 학교는 변화가 없을까. 학생들이 사용하는 공간은 늘어나고 풍요로워졌지만 학생들을 교육하는 방식은 크게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생적으로 학교는 ‘관리’하기 위한 시설의 성격이 크다. 지금 우리가 시행하는 의무교육제도의 학교는 산업혁명 이후에 만들어진 교육기관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사람들은 들판에서 일하던 농부에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직업이 바뀌었다. 학교는 시대의 요구에 맞게 공장에서 일할 수 있는 노동자로 교육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100년간 변함없는 일방적 학교 모습 #자연 없고 지혜는 못 가르치는 공간 #감시·통제 사고론 학교 디자인 못 바꿔 #자연과 서로에게 배우는 환경 필요 #학교 바뀌지 않으면 미래·희망 없어

산업혁명 이후의 건축물과 이전의 건축물을 구분하는 방법은 시계탑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면 된다. 산업혁명 이후에 만들어진 학교와 공장건물 정면에는 시계가 달려 있다. 둘 다 오전 9시까지 출근을 해야 하는 시설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학교에 가서 처음 배우는 노래는 ‘학교종’이다. 그 가사를 보면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이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학교의 주요 목적 중 하나가 졸업 후 시간에 맞추어서 출근하고 일하는 시민을 만들기 위한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시간에 맞추어 등교하고 수업 받는 생활패턴을 주입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연 중에 우리의 교육관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교육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개념이 바탕에 깔려있다. 학교를 디자인하면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이러한 기존의 교육관이다. 안전과 효율을 위해서 감시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커서 새로운 시도가 나오기 어렵다. 게다가 교육은 사회유지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교육 관계자들은 보수적이다. 그러다 보니 학교 디자인은 오랫동안 바뀌지 못했다.

교실·학원 왔다갔다, 학생은 ‘수감생’

꼬마 요정 스머프들이 사는 숲속 마을.

꼬마 요정 스머프들이 사는 숲속 마을.

현 학교시설의 가장 큰 문제는 학생들이 자연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과거 한 교실에 70명씩 들어가는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때는 방과 후 집에 가면 골목길과 마당에서 햇볕을 받으며 뛰놀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아이들은 마당과 골목길 없이, 하늘 없는 복도만 있는 고층아파트에 살면서 학교에 가서도 교실에서만 지낸다. 방과 후에는 상가에 있는 학원에 보내진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삶은 ‘수감생’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이다. 영화 ‘파워 오브 원’을 보면 ‘지식은 책에서 배우고 지혜는 자연에서 배운다’라는 명대사가 나온다. 그 주인공 할아버지가 보신다면 우리나라의 학교는 지식만 가르치고 지혜는 가르치지 못하는 공간이다.

문제의 시작은 운동장에서부터이다. 학교부지는 한정적인데 운동장은 꼭 필요하다. 그러다 보니 건물을 지을 땅이 부족하다. 그런데 학생 1인당 사용하는 실내공간은 1970년부터 2017년까지 7배나 늘어났다. 학생 수는 줄어도 교실은 더 많이 필요해졌고 건물은 점점 고층으로 지어졌다. 학생들은 대체로 50분 수업에 10분 휴식을 한다. 그런데 4층에 위치한 교실에서 건물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긴 복도와 계단실을 100m도 넘게 걸어야 한다. 공간구조상 10분 휴식시간 내에 바깥 공기를 쐴 수 없다. 그러니 먼지가 날리고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없는 교실에서 쉬어야 한다. 아이들이 답답해서 복도에서 뛰면 야단만 친다. 우리의 아이들은 자연과 자유를 박탈당한 상태에서 고통 받고 있다.

상자형 교실과 축구를 할 수 있는 운동장이 붙은 형태의 변함없는 학교 모습. [중앙포토

상자형 교실과 축구를 할 수 있는 운동장이 붙은 형태의 변함없는 학교 모습. [중앙포토

학교 운동장도 문제다. 한 반에 30명의 아이들이 있다면 이중 소수의 남학생들만 축구를 한다. 축구는 육상을 제외하고 가장 시설비가 적게 들어가는 스포츠이기 때문에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축구라는 종목이 엄청나게 많은 공간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소수의 학생들만 축구를 좋아한다는 점이다. 한 무리의 학생들이 축구를 하면 모든 여학생들과 축구를 못하는 남학생들은 날리는 먼지를 마시며 운동장 주변으로 밀려나야 한다. 같은 학생들이지만 축구를 안 하는 학생들은 상대적으로 외부공간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모든 아이들이 뛰노는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어떤 아이들은 구기종목보다 혼자 뛰는 것을 좋아하고 어떤 학생들은 나무그늘에서 꽃을 보면서 쉬기를 원한다. 30명의 학생들이 있다면 수십 가지의 다양한 외부공간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지금 축구장 하나만 만들어 놓고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무슨 시대에 뒤떨어진 전체주의적인 학교인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세종시 행복청, 교육청, 세종시,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세종시 6-4복합커뮤니티’ 지역에 특별한 시도를 하고 있다.

마당 있는 저층 교실이 왕따도 줄일 것

6-4 복합커뮤니티에는 도시계획상 근린공원과 복합커뮤니티센터, 유치원, 초·중·고 학교가 한곳에 모여 있다. 이들이 모여 있게 되면 시너지효과가 생길 수 있다. 학교시설의 대부분은 방과 후에는 사용이 거의 안 된다. 반면 어른들은 주로 퇴근 후와 주말에 많은 공원과 체육시설이 필요하다. 그러다 보니 이 둘을 잘 조합하면 좋은 학교를 만들 수 있다. 6-4 마스터 플랜에서는 학교 운동장을 바로 옆에 있는 공원으로 빼내었다. 덕분에 여유가 생겨난 학교는 교실을 2층 이하로 만들었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2층 이내의 저층형 주택에서 사는 사람들이 고층주거에 사는 사람들보다도 공동체의식과 만족도가 3배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기억을 떠올려 보더라도 아파트에서 산 좋은 추억은 거의 없지만 주택에서는 여러 가지 추억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형 건축물에 하루 종일 들어가 있으면 건물을 보지 못하는 반면 저층형 건물에서는 자주 외부로 나와서 내가 사용하는 건물을 밖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수십 세대가 들어가 있는 아파트는 누구 것인지 불분명하지만 작은 규모의 주택은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밖에서 자신의 건물을 보면서 우리의 기억은 건물과 연동이 되고 좋은 추억이 만들어진다. 반면 건물을 자주 쳐다볼 수 없는 초대형 쇼핑몰이나 고층아파트에서는 일단 너무 커서 내 건물이라는 생각이 안 들고, 건축과 연동된 기억이 안 만들어지고 애착을 못 느끼게 되는 것이다.

교실이 대형 빌딩이 아니라 작은 규모의 주택 같은 이미지로 구성되고 교실 바로 앞에 마당이 있다고 상상해 보라. 학생들이 얼마나 자기 교실건물에 애착을 가지고 공동체의식을 가지게 될지. 자연스럽게 정신적 스트레스는 줄고 왕따와 학교폭력은 감시카메라 없이도 자체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시민들은 대신에 공원 바로 옆에 배치된 체육관과 도서관 같은 시설들을 방과 후와 주말에 편하게 사용할 수 있다. 교정 내에 있는 농구장과 배드민턴장도 사용가능하다.

물론 이런 이상적인 관계가 만들어지려면 시와 교육청 간의 시설관리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학생들도 분동이 된 건물 간에 이동을 할 때 겨울철에는 외투를 걸쳐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서 간의 노력과 약간의 불편함 대신에 얻어지는 것은 ‘마을 같은 학교’와 ‘자연에서 지혜를 배울 수 있는 학교’이다. 교무실 앞에서 뛰는 운동장이 아니라 숲속 가운데 있는 운동장에서 마음껏 뛰놀 수 있다. 체육시간에 좁은 운동장을 뺑뺑이 도는 대신 캠퍼스와 숲을 관통하는 조깅트랙에서 달리기를 할 수 있다. 학생들은 쉬는 시간에도 나와서 정원 잔디밭에 앉아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쉴 수 있다. 이것은 대학생의 생활이 아니라 초·중·고 학생들의 일상이 될 수 있다. 학교에서 12년을 보내야하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쇼핑몰 같은 대형 건물이 아니라 그들만의 ‘스머프’ 마을이다.

우리는 과거 마당이 있는 집에 살았다. 마당은 변화하는 자연이 있기에 작은 공간이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는 많은 추억으로 남는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마당 대신 넓은 거실에서 산다. 거실은 변화가 없다. 그래서 TV도 더 많이 본다. 계절과 날씨로 분위기가 바뀌는 마당이 없으니 집이 좁게 느껴져서 더 넓은 집을 원한다. 그리고 넓어진 집은 각종 물건으로 채운다.

지금의 학교도 마찬가지다. 더 넓은 교실만 원한다. 넓고 다양한 특별활동실만으로 교육의 질을 높이려는 것은 마당 없는 집에 옷방과 서재와 AV룸 등 다양한 방들로 채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변화가 있는 자연이 없을 때 더 넓은 집을 원하는 것처럼, 학교에서 자연이 빠지고 나니 더 많은 교육과정으로 채우려 했고, 그러다 보니 교실은 더 많이 필요해진다. 물론 양질의 교육을 위해서 다양한 교육공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 한 방향으로만 늘려간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자. 계속해서 실내공간만을 키운다면 초대형 쇼핑몰 같은 학교가 만들어져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아이들의 교육을 전부 어른들이 제어하려고 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자연이 아이들을 가르치게 하고, 아이들 스스로가 서로에게 배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대신 너무 어른들이 가르치려고만 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지금의 학교공간은 너무 일방적이다. 지난 100년간 해오던 대로만 하지 말고 다양한 학생들만큼 다양한 학교의 모습도 나와야한다. 만약에 새로운 학교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한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우리 아이들의 학교가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에 희망은 없다. 신대륙을 찾는 콜럼버스의 마음으로, 달나라에 사람을 보내겠다는 케네디의 미래지향적인 정신으로 학교를 바꾸려는 사람들이 이 사회에 많아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유현준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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