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전영기의 시시각각

평화만 외치면 멸시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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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난 주말 중국 국적기의 평양 운행 중단(시진핑 결심)과 그 12시간 뒤 벌어진 미사일 발사의 실패(김정은), 그 9시간 뒤 있은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의 방한(트럼프)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일어났다. 한반도의 긴장이 끊어질 듯 팽팽해지고 있다. 여기에 한국이 비집고 들어갈 공간은 없다. 진실의 순간이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우리는 무력하다.

대선후보들 ‘반전 평론가’ 흉내 #평화 위해 전쟁 결심할 수 있어야

위성사진에 따르면 김정은은 함경북도 풍계리에서 제6차 핵실험 준비를 끝냈다. 미군은 토마호크 미사일 발사가 가능한 구축함 두 척을 한반도 지역에 배치했다. 그중 한 척이 풍계리에서 482㎞ 떨어진 곳에 있다. 전문가들은 제주도와 대마도 사이 어느 한 지점으로 추정했다. 중국은 압록강 하류 태평만댐 위를 지나는 대북 송유관을 언제 잠글지 타이밍을 보고 있다. 송유관은 북한의 목줄이다. 여기를 누르면 평양은 호흡곤란에 빠진다. 김정은은 공포와 전쟁의 유혹을 동시에 느낄 것이다. 아버지 때와 비교할 수 없이 강화된 핵·미사일 능력이 미·중과 맞짱 뜰 만하다는 배포 혹은 착각을 심어줬음 직하다.

김정은의 핵실험, 시진핑의 송유관 차단, 트럼프의 공격 명령은 한국인의 생사를 가르는 운명의 트라이앵글이다. 나뭇잎과 바위와 구름은 각자 움직이지만 트라이앵글의 세 변은 동시에 작동한다.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어떤 특이점을 향해 나아간다. 셋은 4월 7일 트럼프·시진핑의 플로리다 회담에서 시작돼 현재 진행 중이며 미래의 어떤 시점에서 종료될 한 묶음의 사건들이다. 종료 시점이 대선날인 5월 9일 이전일지 이후일지는 하늘만 알고 있다. 차기 한국 대통령은 질적으로 완전히 달라진 한반도 환경에서 조국을 재구성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할지 모른다.

핵실험과 송유관, 공격 명령은 어떤 게 선행 요인이라고 특정하기 어렵다. 하나의 기운, 하나의 케미스트리에 휩싸여 있다.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단이 전무한 가운데 김정은·시진핑·트럼프의 눈치만 보는 현실이 비탄스러울 뿐이다. 한국의 역사는 진전하지 않았다. 구한말까지 갈 것도 없다. 6·25동란의 구도가 김일성·마오쩌둥·트루먼의 결심과 선택으로 짜여졌던 것을 상기해 보라. 그보다 나아진 게 뭐가 있나.

이런 판에 5000만 명 한국인의 운명을 쥐어 보겠다는 대선후보들의 TV토론 경연장은 우스꽝스러웠다. 후보들은 “어떤 군사행동도 안 돼”(심상정), “전쟁은 절대 안 돼”(안철수), “일방적 선제타격은 안 돼”(문재인)처럼 ‘안 돼 안 돼 안 돼~’ 타령만 했다. 비틀스 반전(反戰) 노래를 찬양하는 음악 평론가들인 줄 알았다.

국가 지도자는 국민의 평화를 최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의 이치는 묘하다. 평화를 얻기 위해 전쟁을 결심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전쟁은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의지로 막아 낸다. 노래처럼 평화만 외치는 나라는 주변국한테 멸시받는다. 침략의 손쉬운 표적이 될 뿐이다. 그런 면에서 유승민 후보가 문재인을 향해 “(사드에 대해) 그런 애매한 입장을 취하니 자꾸 중국에 놀아나는 게 아니냐”고 힐난한 것은 정확한 지적이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사대(事大)하듯 꼬리를 물고 베이징을 찾아다닐 때 그렇게 오만을 떨던 중국이 미·중 담판 뒤 눈에 띄게 수그러든 사실을 직시하자. 강대국에 영향을 미치는 건 헤픈 웃음이나 위선적인 평화놀음이 아니다. 그들은 무뚝뚝한 힘과 실력, 자존하겠다는 의지, 국민의 일치된 단결을 두려워한다.

문재인 후보는 미국이 선제타격을 준비할 경우 “북한에 핫라인을 통해 도발을 즉각 중단할 것을 요청하겠다”고 했다. 전쟁을 막겠다는 충정은 이해하겠다. 하지만 김정은 입장에서 문 후보는 타격 정보를 사전에 알려주는 고마운 한국인이고, 미국의 입장에선 전쟁 비밀을 적국에 넘기는 못믿을 동맹일 수 있다. 국가 지도자가 아마추어 평화주의자 행세를 하면 나라가 위험해진다. 나는 문 후보나 민주당을 상대로 종북몰이 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다만 모레 있을 TV토론에서 유력한 후보들이 평론가적 안보관만은 고쳐서 나와 주길 기대한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