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영대의 지성과 산책] 폴리페서가 욕먹는 건 정의 아닌 권력의 도구가 됐기 때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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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과 정치의 관계는 이중적이다. 그 이중성을 이야기할 때 많이 거론되는 인물이 존 스튜어트 밀(1806~1873)과 알렉시 드 토크빌(1805~1859)이다. 19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각각 『자유론』과 『미국의 민주주의』같은 세계적 고전을 펴냈으면서 현실 정치에도 깊이 관여했다. 밀은 3년, 토크빌은 13년 동안 하원의원 등을 역임하며 직업 정치인으로 분투했다. 그들의 정치 참여의 결과는 어땠을까.

지식인·정치 관계 연구 서병훈 교수 #하원의원 지냈던 19세기 지식인 #밀과 토크빌 10년간 비교 분석 #사회지도층 사명감으로 정치 참여 #둘 다 큰 성과 못 내고 좌절에 빠져 #학문을 직업으로 삼는 게 지식인 #자기 전문성으로 기여할 길 고민을

지난 10년 동안 두 인물을 연구해온 서병훈(62)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평가는 부정적이다. 그들의 저술이 인류사에 미친 영향에 비하면 정치 참여의 성적표는 그야말로 미미하다는 얘기다. 작은 이야깃거리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두 사람 다 자신의 정치 생활을 되돌아보며 동일한 회한에 잠겼고, 지식인은 역시 글을 써서 역사에 보답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해주었습니다.”

밀과 토크빌을 개별적으로 연구하는 경우는 많아도 두 사람을 비교 연구하며 그들의 정치 참여 결과까지 되새겨보게 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 점을 평가받아 서 교수의 연구는 서양 지성사 관련 최고의 권위지로 꼽히는 ‘History of European Ideas’(영국 라우틀리지 출판사, 2016년)에 실렸고, 최근 『위대한 정치』(책세상·사진)라는 책으로 출간됐다. 돌아온 대선, 정치의 계절에 ‘위대한 정치’는 우리 모두의 간절한 희망일 것이다. 과연 위대한 정치를 이루기 위해 지식인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서 교수님도 대선 캠프에 참여하고 있나요.
“아니요, 요청 받은 적 없습니다. 각 정당이 주최하는 행사에 일절 응하지 않으니까 아예 부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정치학과 교수라면 유혹을 느끼지 않나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잖아요. 신문은 글쓰는 것이니까 젊어서는 제법 기고를 많이 했지만, 방송은 요청이 와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서 교수는 지식인의 범주를 “학문을 직업으로 삼는 전문 지식인”으로 설정하면서 주로 대학교수를 염두에 두고 말을 이어갔다. 지식인의 정치 참여 방법을 네 가지로 분류했다. 1.대중 정치인으로의 변신 2.공직 진출 3.언론 투고나 시민운동 4.시대적 문제의식을 글쓰기로 표출. 이 가운데 1번과 2번이 현실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다. 서 교수는 10년 전부터 4번의 글쓰기만 하고있다. 3, 4번을 병행하기도 힘든 일이라고 했다.

정치와 학문은 병행할 수 없을까. 서병훈 숭실대 교수는 지식인의 현실 정치참여에 회의적이다. 『자유론』 『미국의 민주주의』같은 고전을 쓴 지식인이면서 현실 정치에도 깊이 관여했던 존 스튜어트 밀과 알렉시 드 토크빌의 삶과 정치를 10년간 연구했다. 그 결과물 2부작의 첫권 ?위대한 정치?(책세상)를 최근 펴냈다. [강정현 기자]

정치와 학문은 병행할 수 없을까. 서병훈 숭실대 교수는 지식인의 현실 정치참여에 회의적이다. 『자유론』『미국의 민주주의』같은 고전을 쓴 지식인이면서 현실 정치에도 깊이 관여했던 존 스튜어트 밀과 알렉시 드 토크빌의 삶과 정치를 10년간 연구했다. 그 결과물 2부작의 첫권 ?위대한 정치?(책세상)를 최근 펴냈다. [강정현 기자]

언론 투고나 시민운동의 어떤 점이 힘든가요.
“그같은 사회적 발언을 하면 들뜨게 되죠. 반응에 대한 기대 때문입니다. 스스로 컨트롤하기가 쉽지 않아요. 10년 전 밀과 토크빌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면서 ‘이건 아니잖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힘 있을 때 자기 공부를 더해야 뭔가 성취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는 것 아닌지.
“지식인이 자기 이익만 챙기며 기능적 지식인으로 안주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요. 그런 사람보다는 폴리페서라고 비난받는 일이 있더라도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제 말은 지식인이 자신의 전문성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일이 뭔지를 좀 더 고민하는 일이 필요함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밀과 토크빌이 현실 정치에 참여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당시에는 사회에 대한 빚을 갚는 것이 사회지도층 인사의 의무라고 간주됐죠.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그겁니다. 그런데 ‘내가 정치를 잘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밀과 토크빌 두 사람 다 없었습니다. 대중을 설득해서 정치를 한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자기 주변 동료나 지식층 인사를 설득하면 그게 정치라고 생각했죠. 그러다 좌절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들의 정치 참여 를 실패라고 보는 건가요.
“실패라고 하면 너무 일방적일 겁니다. 혼자서 정치 다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밀은 분투를 했고 어느 정도 성과를 냈다고 볼 수도 있어요, 그러나 지식인으로서의 명성에 비하면 그 성과라는 게 미약하다는 얘깁니다. 토크빌은 13년 동안 정치를 했는데 별로 이루는 게 없습니다. 자기 주장을 하면 잘 관철이 안 되고, 어쩌다 관철이 되면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하니까 좌절을 느끼게 되죠.”
지식인의 정치 참여는 무엇이 달라야 할까요.
“권력의 도구가 아니라 공의, 정의의 도구가 되어야하지 않을까요. 지식인이라면 지향하는 이상이 있을 것이고 그래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일 테니까요. 이런 말이 너무 이상적인가요? 우리 국민들이 폴리페서라고 정치 참여 지식인들을 욕하는 이유가 권력의 도구로 보이기 때문 아닌가요? 권력자에 충언하는 지식인을 보기 힘들잖아요. 박근혜 전 대통령도 누군가 몸을 던져 막은 지식인이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밀과 토크빌은 많은 조건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정치에 대한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에 그 성과가 약했습니다.”
대중정치를 잘할 수 있는 능력은 뭐라고 보시나요.
“지식인의 한계이자 딜레마라고 할까요, 자기 확신이 없으면 지식인이라 말할 수 없고, 그렇다고 확신이 강하면 독선으로 가고…. 베버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나눠서 얘기했죠. 베버는 책임윤리가 중요하다고 했는데, 제대로 된 지식인이라면 신념윤리가 강할 수밖에 없죠. 그러다보면 대중과 보조를 맞추기 어렵죠. 밀과 토크빌도 주변 동료 정치인들과 어울리기 힘들어했습니다. 대중보다 반발 정도 앞서가야 하는데 너무 앞서가고….”

지식인의 사회기여는 자기 자리 제대로 지키는 것

소크라테스는 ‘자유인의 도리’라는 명구를 남겼다. 국가와 사회에 진 빚을 갚기 위해 고민하는 것이 자유인의 도리라고 했다. 소크라테스 자신은 교육에 몰두함으로써 그 도리를 다하려고 했다. 서병훈 교수가 보는 지식인의 길이다. 지식인이 자기 자리를 제대로 지키는 것 자체가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했다. “현실 정치 참여와 학문을 병행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봅니다. 불교 수행자를 이판, 사판 둘로 나누지 않습니까. 수행에 전념하는 사람들은 바깥일에 기웃거리지 않습니다. 저는 학문의 세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지식인이 정치 현실에 초연하게 살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는 ‘포퓰리즘과 한국정치’(가제)라는 책을 준비하고 있다. “제가 글을 쓰거나 하는 일이 정치에 무관하냐, 그건 아니죠. ‘왜 한국정치는 비대위가 상시 가동되며 새정치 찾는 일이 반복되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질 겁니다.”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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