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도, 저자도 모른 채 책을 사라고?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26호 29면

“죄송합니다. 저는 이 책을 어떻게 권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재밌다’‘매력적이다’라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타이틀을 숨기고 팔아보기로 했습니다.” 지난 해 가을 일본 여행을 갔다가 표지에 이런 문구가 쓰인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책이 쌓인 매대에는 ‘문고 X’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고, 보통 책 제목이 적혀 있는 책등에는 ‘사와야 서점의 혼을 담은 한 권!’이라고 손글씨로 적혀 있다.

‘개봉열독 X시리즈’

오, 이건 뭐지? 안내문에 따르면 이는 지난 해 7월 일본 이와테현 모리오카시에 있는 사와야 서점 페잔점에서 시작된 이벤트였다. 신입 서점 직원 나가에 다카시로씨가 이 책을 어떻게 하면 널리 알릴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제목이나 저자 등의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판매하기로 했다는 것. 결과는 놀라웠다. 평소 이 서점에서 하루 한 권 나가던 책이 표지를 가리자 일주일 만에 60부가 팔린 것이다. 지방의 작은 서점에서 시작된 이 이벤트는 이후 일본 전역 650개 이상의 서점으로 퍼져나갔고, 책은 11만권 넘게 팔렸다. 여기서 질문. 책을 산 사람들은 ‘문고 X’가 어떤 책인지 금방 알았을 텐데, 어떻게 행사가 계속될 수 있었을까. 이벤트를 시작하면서 서점측은 12월 9일 제목을 공개할테니, 이미 구입한 독자들도 SNS 등에 책 정보를 올리지 말아 주십사 당부했고, 독자들이 그 약속을 지킨 것이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를 금세 알게 됐다. 서점을 나서며 서둘러 포장을 뜯는 내게 함께 있던 친구가 물었다. “그래서, 무슨 책이야?” 나도 모르게 답이 튀어나왔다. “안 가르쳐주~지.”

‘이거 기발한데?’ 라고 생각했던 이 기획에 국내 출판사들도 도전한다는 소식이 최근 전해졌다. 마음산책·북스피어·은행나무 세 출판사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개봉열독 X시리즈(사진)’다. 세 출판사는 올해 출간 예정이었던 신간 중 ‘색다른 방식으로 소개하고 싶은’ 책을 한 권씩 골라 ‘은행나무 X’ ‘북스피어 X’ ‘마음산책 X’라고 명명한 후, 고운 손글씨가 적힌 종이로 책 전체를 감쌌다. 오는 24일까지 온라인 서점에서 예약판매를 하고, 25일부터는 전국 오프라인 서점에도 깔린다. 물론 그 때도 제목과 저자는 가린 채로다.

힌트는 있다. 각 온라인 서점 담당 MD들이 쓴 추천사가 포장지에 적혀 있다. 책의 정체는 5월 16일 자정에 밝혀지는데, 그 시간까지 비밀이 지켜질 수 있을지가 관전 포인트다. 포장지의 손글씨는 마음산책 정은숙 대표가 직접 썼다. “당신과 함께 뭔가 재미난 일을 작당하고 싶었습니다. 동참해주실 거죠?”

자,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일본에서 구입한 ‘문고 X’의 정체는 저널리스트 시미즈 기요시가 쓴 『살인범은 거기 있다(殺人犯はそこにいる)』(신초사)라는 논픽션이었다.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는 1990년 도치기현 여아 연쇄 납치 살인사건의 실체를 저자가 발로 뛰며 파헤친 책이다. 제목이 공개된 후 쏟아진 독자 리뷰에는 이런 내용이 많았다고 한다. “논픽션에는 관심이 없어 제목을 알았다면 절대 집어들지 않았을 책. 이렇게 만날 수 있어 다행이다.”

‘문고 X’의 기획자였던 나가에씨가 일본의 한 서평 사이트에 올린 글을 읽었다. 그는 “이 이벤트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이 책이 지닌 압도적인 힘 때문”이라고 썼다. 또 독자들에게 “당신을 흔드는 작품은 서점 선반의 어딘가에 틀림없이 존재한다. 선입견을 극복하고 책을 만날 수 있다면 책 때문에 인생이 바뀔 가능성은 현저히 높아질 것”이라 조언한다.

어디 책을 살 때 뿐일까. 선택의 순간에 우리는 먼저 판단한다. 이것은 내 취향인가, 내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하지만 그런 ‘합리적인’ 선택만 반복해서는 나의 판단을 넘어선, 저 높은 선반 위에 놓여있는 멋진 무엇과 만날 가능성은 점점 줄어든다. 하여, 조용히 온라인 서점 창을 열고 정체를 감춘 ‘X’들을 주문해 본다. 그리고 기대한다. 인생의 많은 놀라운 것들은 제목을 감추고 우리에게 오는 지도 모른다고.

글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