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평민당위원장 부인|이희호 여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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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신촌로터리를 지나 홍대입구로 접어드는 언덕길 오른편 첫골목 안쪽에 그 유명한 「동교동」이 자리잡고 있다. 이집 안주인 이희호여사(65)는 밤색 체크무늬 모직 원피스차림에 돋보기를 겸한 금테안경을 쓰고 2시간에 걸친 인터뷰에서 「동반자로서의 삶」을 담담한 어조로 털어놓았다.
-김대중위원장이 불출마 선언을 번복하고 출마를 선언하더니 그 여파로 민주당이 분당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읍니다. 그 번복을 놓고 국민들 사이에선 「신뢰할수 없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는데요.
『아시다시피 불출마선언은 전정권의 직선제수락을 전제로 한 조건부였읍니다. 당시엔 나라의 운명이 심각한 국면에 놓여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대통령출마를 안한다면 직선제를 받아들일 것」이라며 권유했었지요. 그러나 이 제안은 즉각 거부됐고, 따라서 무효나 다름없읍니다.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던 이들이 오히려 4·13조치를 발표, 호헌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결과적으로 6·29선언으로 직선제를 받아들인 셈이 아닙니까.
『그때는 이미 상황이 크게 달라진 후지요. 양보하겠다는, 즉 불출마하겠다는데 대한 타협으로서의 수락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않으면 안될 상황으로 몰려갔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점을 국민이 이해해야합니다.』
-김위원장은 지난번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부인의 영향력에 대해 「상의는 하되 결정은 자신이 한다」고 밝힌바 있읍니다. 불출마선언과 번복의 경우는 어땠는지요.
『두번 모두 의논을 하더군요. 불출마 선언때는 시국수습을 위해 좋다고 생각했읍니다. 성명서를 작성할때 내가 정서를 했어요. 이번 출마선언때 역시 이미 무효화된 것을 놓고 그것에 얽매어 자기가 나아갈 길을 막을 필요는 없다고 여겼습니다.』 -결혼은 어떻게 하셨읍니까.
『51년인가, 어느 회합에서 김정례의원등 몇몇 분과 점심을 함께 했을때가 첫 만남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는 사업가였는데 지금처럼 살이 찌진 않았어요(읏음).
특별한 기억은 없고, 사업가이면서도 책을 많이 보는 분이란 인상을 받았지요.』 당시 김위원장은 처자가 있는 사람이라 결혼은 생각도 못했단다. 이여사가 김위원장을 결혼상대자로 다시 만난 것은 61년 후반. 당시 39세의 노처녀였던 그는 『대범한 성격과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생각하고, 자신의 일에 도움을 주되 간섭하지 않는 사고방식이 마음에 들어』 이듬해 3세 연하인 김위원장과 외삼촌댁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흔히 전부인소생 자녀들이 있을 경우 갈등이 많은데 이여사의 경우는 어땠읍니까.
『쉬운 일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아이들 (홍일·홍업) 을 친자식처럼 여기고 잘해주었읍니다. 그것이 나 자신이나 홍걸(이여사소생·25·미호버스미드대재학중)이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읍니다. 다행히 아이들도 나를 친어머니처럼 대해주었어요. 아버지에게 전할 말도 나에게 먼저 의논할 정도니까요.』
그는 『결혼전 가까이 접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자신의 인상이 까다롭고 냉정하게 보이는 까닭에 우려를 많이 했다』고 술회. 그러나 정작 자신은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대로 지나치지 못하는 정많은 사람』이라면서 『아마 인상까지 정많아 보이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감당하지 못할것』이라고 조크.
-김위원장은 「카리스마적 지도자」라는 세평이 있읍니다.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김위원장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남편과 나는 동반자며 동지입니다. 아이들에게도 명령조로 요구하는 일 없이 그들의 의사를 존중해줍니다. 아이들의 앞날에 대해서도 조언에 그칠뿐, 스스로 선택하도록 하지요. 카리스마적이라는 이미지는 그의 민주주의 의지가 워낙 투철해서 생겨난게 아닐까요.』
-홍일씨(40)나 홍업씨(37·LA인권문제연구소)가 김위원장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도 본인들의 선택입니까.
『물론입니다. 그러나 외부적 요인도 컸지요. 아이들은 아버지로 인해 특히 희생이 컸읍니다. 받아주는 곳이 없으니 취직할 수도 없고, 큰 자본이 없어 장사할 형편도 못되고, 우두커니 앉아있을 수도 없으니 자연 아버지와 함께한 것이지요.』 -정치가 아내로서 고층이 많으실텐데요.
『5·17로 내자신 연금 당했을때는 며느리까지도 집에 못올 정도로 지독했읍니다. 눈코뜰새없이 바쁜 요즘은 요즘대로 또 어려움이 많지요. 이 집을 호화주택이라고 한답디다만 (웃음) 우리 거처는 안방뿐이고, 그나마 아침7시면 남자들이 몰려와요. 새벽1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자리에 드는데 아무리 늦어도 6시까진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어야합니다. 늘 공중앞에 선 자세로 긴장하며 살아야하고, 어떤 때는 밥먹을 공간도 없어 조리대에 서서 먹기도 합니다.』 (실제로 김위원장댁 식당은 VIP용 간이응접실로 쓰이고 있었다.)
-정치가로서 김위원장의 단점과 장점은 무엇입니까.
『모든 분야에 대한 폭넓은 지식, 자신의 신념에 대한 확신이 장점이지요. 단점이라면 너무 완벽한 것이라고나 할까요』
-김위원장의 대통령 당선 가능성은 어느 정도로 보십니까.
『마땅히 당선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남편이라서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했고 그 때문에 핍박과 죽음의 경지까지 겪어가며 희생당했읍니다. 정책면에서 보아도 즉흥적이 아니고 70년대부터 오랜 구상과 검토를 해왔으므로 능력이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분의 소명감입니다. 죽음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마다 하느님의 역사가 임해서 살아나곤 했읍니다. 하느님의 뜻이 정치적 면에서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 일하라는 뜻으로 살려주었다고 본인도 느끼고 나도 느낍니다.』
-그렇다면 다른 세명의 대권주자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깊이 생각은 안해봤지만 유신에 관여했고, 전정권에 관여한 분들은 이 나라 민주주의에 역행한 분들이라고 봅니다. 새롭게 출발하는 이 마당에, 그리고 민주국가의 태동이라는 시점에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봅니다.』
-대권주자 부인들과 교분은 있읍니까.
『민주당, 김영삼총재부인과는 식사도 여러번 함께 했지요. 그러나 다른 분들은 전혀 몰라요. 아시다시피 「기피인물」아닙니까? (웃음)』 -20대의 김위원장 행적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는 이들이 종종 있읍니다. 이 부분에 대해 이여사가 알고 계신 것을 들려주시지요.
『(약간 불쾌한 어조로) 지난번 관훈클럽토론에서 밝힌 그대롭니다. 사상이 불투명한 사람을 80년, 87년 두번씩이나 복권시켜 정치활동을 하게 할 정부는 아니지 않습니까.
또 철저한 우익으로 알려져 있는 내가 어떻게 좌익하고 살 수 있겠읍니까. 말도 안됩니다.』
-이여사는 50년 여자청년단을 조직, 외교국장도 지냈고 대한YWCA총무 및 상임위원·여성문제연구회제2대회장(64∼70년)·범태평양동남아세아여성연합회 한국지회부회장(68∼72년) 등 여성계 경력도 다채롭습니다. 사회활동을 시작한 이유와 현재 우리여성들의 문제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세브란스의전을 나오신 아버지(이룡기씨)의 4남2녀중 네째이나 맏딸이어서 어렸을 때부터 남녀차별은 겪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전체여성들의 지위가 낮아 이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여겼고, 또 미국유학 당시 「여성지도자교육」을 강조, 장학금을 받게 해준 목사님의 당부가 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읍니다. 그 결과지요.
현재 우리 여성의 문제는 법적으로 동등한 위치에 있지 못한 것과 여성 스스로의 열등감입니다.
남편은 아내보고 「제가」라고 하지 않는데 아내만이 남편에게 「제가」라고 낮춤말을 쓰는 것도 그런 일례지요. 그래서 나는 「내가」라고 합니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은 구별되지만 차등은 없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가정에서의 민주주의 확립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밖에서 민주주의를 부르짖어도 안에서 아내를 천대한다면 이 나라 민주주의는 절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식객이 많아 생활비가 많이 들텐데 어떻게 충당하십니까.
『식구중에 아무도 월급받는 이가 없어 가계부 쓰기도 수월치 않은데다 생활이 들쭉날쭉이니 감잡기도 힘들어요. 요즘에는 하루 2백∼3백명의 손님으로 북적대지만 연금당하면 「적막지대」로 돌변합니다. 그래서 늘 종이컵 신세지요. 까마귀가 양식을 공급한다는 성경귀절처럼 이사람 저사람 우리를 염려하는 분들이 도와주셔서 그럭저럭 꾸려갑니다.』
-김위원장의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십니까. 좋아하는 음식은.
『특별한 것은 없어요. 요즘처럼 대외활동이 많을때는 캡슐로 된 인삼이나 트로츠 (성대보호제) 를 아침에 챙겨주는 정도지요.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싱싱한 생선회지요.
매운탕도 즐기구요. 미역국은 아침이면 늘 찾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식구들도 많이 먹어요(웃음).』
-만약 퍼스트 레이디가 된다면 어떤 역할을 하시겠읍니까.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특별이 퍼스트 레이디라고 해서 주부로서의 역할이 바뀐다고는 보지 않아요. 덧붙여 「시중의 소리」를 주의깊게 들으려고 노력하고 또 이를 대통령께 전달, 바른 판단과 시책을 퍼나가도록 돕는 파수꾼이 되겠어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란 시편23편을 제일 좋아한다는 이희호여사. 『매터도가 가장 괴롭지만 모든 어려움은 내가 믿는 하느님께 매달리는 것으로 극복한다』는 그는 남편으로부터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내」로서의 위치를 충분히 지켜가고 있는듯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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