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光復, 세계화에 대해 묻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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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광복절 하면 떠오르는 사진이 있다. 이경모 사진집에 실린 남도 끝자락 어느 마을의 1945년 8월 15일을 스케치한 사진이 그것이다. 초가 위 대나무 깃대에는 일장기로 급히 만든 태극기, 해방감을 만끽하면서도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길거리로 쏟아져 나온 남녀노소 마을 주민들의 표정을 잘 잡아냈다.

삼각산이 저절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듯한 기쁨과 감격은 그 마을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아마 해방은 한반도 주민 모두에게 그렇게 흥분과 감동으로 다가왔을 것이고, 광복절은 지금도 여전히 '감격시대'로 기억된다.

감동이 크면 그것을 지켜내기 위한 희생도 큰 법이다. 불행하게도 45년 8월 15일 이후 몇 년의 역사는 우리 민족이 그 감동을 새로운 건설로 승화시키기 위해 그다지 현명하게 행동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분단에 대해서는 우리 내부의 내 탓, 네 탓이 있을 수 있고, 주인 행세를 하려 한 손님을 탓할 수도 있겠다.

한국 현대사를 살펴보면 흥미롭게도 약 50년 주기로 위기가 닥치고, 그것은 항상 내환(內患)이 외우(外憂)와 겹쳐 일어났음을 보게 된다. 한말의 위기가 경술국치로 이어지더니, 해방에 이어 분단이 찾아왔다. 20세기 마지막은 남한의 경제위기와 북한의 핵위기로 장식됐고, 마지막 위기의 잔영은 아직도 남과 북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위기에 대한 반성적 진단으로 우리 민족이 국제정세에 어두웠다는 얘기를 곧잘 듣는다. 위기의 본질과 그 외발성(外發性)이 갖는 역사적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또 올바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측면에서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민족이 국제정세를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세계화는 이 시대의 화두이지만 지금의 세계화야 영어 잘 해서 외국에 물건 하나 더 팔자는 세계화이지, 주체적 전망을 가진 세계화는 아닌 것 같다. 세계화 구호를 들을 때마다 아마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세계화된 분들은 일제에 항거해 싸운 혁명가들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 당시 독립운동은 이미 세계화의 또 다른 표현이었던 것이다.

김구는 나라의 독립을 찾기 위해 온 중국을 돌아다녔으며, 김규식의 발자취는 미국과 소련.중앙아시아에까지 미쳤고, 심지어 이승만조차 소련을 방문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던가. 이들이 구경 삼아 전 세계를 무른 메주 밟듯이 밟고 돌아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직 한 가지 나라의 독립을 찾기 위해 고난을 무릅쓰고 돌아다녔던 만큼 그들이 나라 밖에서 익힌 견문과 식견에는 주체적 고민이 배어 있었을 것이다. 감격시대의 흥분을 새로운 건설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이들의 세계화 고민을 모두 용광로에 부어 넣고 끓여 우리에게 맞는 새로운 시금석을 만들어내야 했고, 해방 직후는 그러한 창조의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컸던 시대였던 만큼 실패에 대한 아쉬움도 많다.

이 땅에 들어온 손님들은 항상 편 가르기를 시킨다. 한말 개항기에 개화의 모델과 이권을 둘러싸고 친일파니 친미파니 친청파니 친러파니 편을 가르더니 해방 이후에는 반공주의를 기준으로 패가 갈렸다. 편 가르기에 휘둘린 우리 민족의 우둔함을 탓해야겠지만 이러한 편 가르기는 한반도에 한정되지 않고 주변국 문제와 얽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단적으로 한국전쟁 당시 중국의 유엔 가입 문제와 대만 문제가 전쟁과 얽혀 있지 않았으면 그렇게 전쟁이 장기화됐을 것인가. 포로 송환 문제로 휴전회담이 지연됐을 때 특히 문제가 됐던 것은 한국인 포로보다는 중국인 포로였고, 그 배후에는 동아시아 신질서 수립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 간의 대립이 있었다.

북핵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이 적극적인 중재 역할을 맡고 있다. 위기의 원인 규명은 제쳐 두더라도 한반도에 드리운 먹구름을 걷어내기 위해 관련국들이 공동의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아울러 결국 한반도가 불가피하게 세계화의 중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음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남도의 끝자락에 메아리쳤던 해방의 감동과 아울러 그 날이 가진 세계사적 의미를 되짚어볼 때다.

정용욱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