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엔 건반, 밤엔 ‘퍽’ 많이 두드렸죠 … 빙판 휘젓는 ‘피아니스틱’ 한수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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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한수진은 피아니스트 대신 아이스하키 선수가 됐다. 빙판 위에서 스틱을 잡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해서다. [사진 한수진]

한수진은 피아니스트 대신 아이스하키 선수가됐다. 빙판 위에서 스틱을 잡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해서다. [사진 한수진]

몇 해 전까지도 그의 가녀린 손은 피아노 건반을 오갔다. 지금 그의 손은 장갑 속에서 흠뻑 땀에 젖어있다. 한국 여자아이스하키대표팀 센터 한수진(30). 피아니스트 출신 아이스하키 선수다.

연세대 기악과 출신 피아니스트 #초등생 때 맛본 ‘스틱’ 못잊어 도전 #말리던 어머니도 이젠 찾아와 응원 #“저요, 다혈질에 승부욕 엄청 강해” #강릉 세계선수권 1·2차전 승리 견인 #오늘밤엔 작년 이겨본 북한과 격

한국은(세계 23위)은 지난 3일 강원도 강릉 관동하키센터에서 열린 2017 여자아이스하키 세계선수권 디비전2 그룹A(4부리그) 2차전에서 영국(21위)을 3-1로 꺾었다. 한수진은 1피리어드에 상대 골리의 다리 사이를 뚫는 골로 승리를 이끌었다. 한국은 2일 슬로베이나(24위) 1차전 5-1 승리에 이어 2연승이다.

한수진은 피아니스트가 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예원학교-서울예고-연세대 기악과(피아노 전공)를 졸업했다. 그는 “아이스하키는 초등학교 때 취미로 1년쯤 하다 그만뒀다. 어머니(조효상·59)는 내가 피아니스트가 되길 원했다. 대입 재수를 하던 2006년, 피아노 레슨을 받으러 가는 길에 목동빙상장에서 아이스하키 경기가 열리길래 무작정 들어갔다. 그 때 아이스하키를 향한 열정이 되살아났다”고 말했다.

“아이스하키를 하겠다”는 딸의 ‘폭탄선언’에 어머니는 펄쩍 뛰었다. 한수진은 어머니 몰래 아이스하키 장비를 사들였다. 하루는 새벽에 잔뜩 화가 난 어머니가 그를 깨웠다. 장비 구매 영수증을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들킨 것이다.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어머니는 “피아노로 대학에 가면 아이스하키를 허락하겠다”고 조건부로 승낙했다.

한수진은 그 해 어머니 바람대로 대학에 진학했다. 입학하자마자 남자 뿐인 대학 아이스하키 동아리에 가입했다. 그리고 2007년 여자아이스하키 대표팀에 뽑혔다. 그는 “피아노 콩쿠르에 나가면 나홀로 번호표를 달고 무대 위에 올라가 외로운 싸움을 한다. 떨려서 악보를 까먹기도 했다. 반면 아이스하키는 옆에 늘 동료들이 있다. 아이스하키 쪽 구호인 ‘원 바디(우리는 한몸)’가 좋았다”고 말했다.

한수진은 피아니스트 대신 아이스하키 선수가 됐다. 빙판 위에서 스틱을 잡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해서다. [강릉=임현동 기자]

한수진은 피아니스트 대신 아이스하키 선수가됐다. 빙판 위에서 스틱을 잡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해서다. [강릉=임현동 기자]

결국 한수진은 빙판을 택했다. 아이스하키를 더 잘하고 싶어 2011년 일본 아이스하키 클럽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있었던 그 해다. 손에 200만원을 들고 무작정 일본으로 향했다.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로 만두를 빚고 설거지를 했다. 방 월세를 내려고 1500만원을 대출받았는데 다 갚는데 3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 한수진은 낮에는 대학에서 수업을 듣고, 밤에는 태릉선수촌에서 훈련을 했다. 대학은 입학 7년 만인 2014년 마쳤다.

한국 여자아이스하키는 세계 무대에서 동네북 신세였다. 2007년 일본에 0-29로 참패했다. 아는 사람들이 “비전도 없는 걸 왜 하냐” “한달에 120만원(국가대표 하루 훈련수당 6만원) 벌어 생활이 가능하냐”며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그럴 때면 그는 “전엔 국가대표 하루 수당이 3만5000원이라 월 60만원을 받은 적도 있는데, 두 배로 늘지 않았냐”고 받아 넘겼다.

한수진은 키가 1m59cm로 작은 편이다. 하지만 스피드가 좋다. 그가 좋아하는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시카고 블랙호크스의 조나단 테이브스(29)처럼 궂은 일을 도맡는다. 그는 2013년 한국을 세계선수권 디비전2 그룹B(5부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지난 2월 삿포로 아시안게임에선 중국을 사상 처음 꺾고 4위에 오르는데 기여했다. 그렇게 반대했던 어머니도 이제 경기장을 찾아 응원할 만큼 든든한 지원군이다.

짙은 쌍꺼풀이 매력적인 한수진은 인터뷰 장소에 FC바르셀로나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왔다. 그는 “머리카락은 걸리적거려 짧게 잘랐다. 좋아한다던 남자도 있었지만 3년째 솔로”라며 “드레스를 입고 콩쿠르에 나가는 것보다 빙판 위에서 스틱을 잡는 게 더 행복하다”고 말했다. “말투가 나긋하다”는 말에 곧바로 “다혈질에다 승부욕도 엄청 강하다”는 반격이 나왔다.

호주(28위)와 3차전까지 마친 한국은 6일 오후 9시 북한(26위)과 격돌한다. 2003~14년 북한을 상대로 4전 전패였던 한국은 지난해 3월 세계선수권에서 북한을 4-1로 꺾고 첫 승을 거뒀다. 그는 “북한 선수들은 스피드가 빠르다. 지난해 이겼다고 절대 얕보면 안된다”고 말했다. 한국은 8일 네덜란드(19위)전까지 치러 5개국 중 1위를 하면 디비전1 그룹B(3부리그)로 승격한다.

강릉=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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