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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의 여성화' 심각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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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즈음 우리 사회에서는 빈곤층의 증대나 사회 양극화 문제, 그리고 중산층 붕괴 현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정부는 양극화를 해소할 사회정책적 대응에 골몰하고 있고, 시민사회운동단체들 역시 여러 정책을 제안하거나 자활사업과 사회적 일자리 창출을 포함한 다양한 실천활동을 모색하고 있다. 또한 출생률 저하와 급속한 고령화의 심각성에 비추어 정부.시민사회.종교.경제계가 공동으로 '저출산고령화대책연석회의'를 결성해 그 활동을 시작했다. 이런 움직임은 한편으로는 당면 사회 문제의 심각성에도 기인하는 것이지만, 달리는 우리 사회가 소홀하게 다루었던 사회복지에 대한 관심 증대로도 읽힐 수 있어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이 얼마나 성(gender) 문제를 고려하면서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빈곤의 여성화' 이슈는 이미 1976년 미국에서 다이애나 피어스(Diana Pearce)의 조사 결과와 더불어 제기됐다. 미국의 16세 이상 빈민 중 약 3분의 2, 성인 빈민의 70% 이상이 여성이라는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빈곤의 여성화'는 '빈곤의 절대다수가 여성이 되어 가는 것'이다. 따라서 80년대 미국 정부의 '빈곤과의 전쟁'에서는 성을 고려하는 정책방식이 적극적으로 활용됐다. '빈곤의 여성화'는 전 세계적인 추세이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더 빠르고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다. 빈곤문제연구소의 2000년 통계에 따르면 전체가구 중 여성가장의 비율은 18.5%인데 비해, 빈곤가구 중 여성가장의 비율은 45.8%에 이른다. 그래서 여성가장의 빈곤 위험률은 남성가구주의 경우보다 3배 이상 높게 나타나고 있다. 중소기업의 파산, 신용불량자 양산 등은 이혼과 배우자 가출을 증대시켰고, 한 부모 여성가구주는 계속 늘어났기 때문이다.

지난 10년 사이 한국에서는 가정폭력과 성폭력을 금지하는 법률 제정이나 호주제 폐지, 할당제 실시 등과 함께 여성의 인권과 지위는 상당히 개선됐고, 공론의 장에서 여성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그러나 바로 이 시기에 '빈곤의 여성화'가 진전된 것은 한국 여성이 처한 이율배반적인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제 여성 빈곤의 현실을 개선하지 않고서는 전체 빈곤 문제의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고, 그래서 일자리 창출에서부터 고령화 문제에 이르기까지의 정책에서 성 인지적 관점 도입이 불가피해졌다. 2004년 유엔이 여성지위위원회 회의를 통해 각국 정부에 성별 분리통계 및 정부 정책에 대한 성별 영향평가를 강력하게 요구한 것은 남녀를 분리해 접근하는 것이 사회 문제 해결의 효율성을 높인다는 사실을 인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2005년 사회 양극화 해소를 위한 국가전략으로 발표된 '희망한국 21'에서는 성을 고려한 지원대책은 크게 고려되지 않고 있다.

여성 빈곤을 해소하는 데 있어 우선 중요한 것은 노동시장에서의 성차별 극복일 것이다. 이를 위해 여성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이나 성차별적인 고용을 해소해야 할 것이다. 남성 부양자 모델에 근거한 사회보장정책의 개혁이나 성별을 고려한 연금제도의 개혁도 필요하다. 연금제도에서 2003년 기준으로 여성 가입자 비율은 24.7%에 불과하고, 이는 여성노인의 빈곤화를 예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보육이나 노인수발 등을 포함한 '돌봄노동'에 대한 사회적 지원도 확대돼야 한다. 이런 성 인지적인 탈빈곤정책은 중앙정부의 정책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지역정부, 나아가 지역사회에서의 적극적인 실천노력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여성 빈곤을 완화할 뿐 아니라 사회적 빈곤의 전체 규모를 줄이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도 성 문제는 단지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체 사회문제의 핵심적인 일부임이 확인된다.

정현백 성균관대 교수·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