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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세월호 잠수 구조 생각나 먹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칠흑 같은 바닷속에서 구조 작업을 하고 있으면 이따금씩 ‘탕! 탕!’ 배 벽을 때리는 소리가 났어요. 배 안에 있던 공기가 분출되면서 나는 소리였겠지만 그 소리가 마치 생존자들이 안에서 벽을 치면서 나는 소리처럼 들려 두려웠습니다.”

민간잠수사 지원 나섰던 신준민 씨 #도움 못됐다는 압박감 아직도 남아 #잠수부 대부분 트라우마 겪고 있어 #예고 없는 재난에 대응 가능하도록 #예산과 숙련된 구조인력 양성 필요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 그 비극의 현장에서 민간잠수사로 구조 지원에 나섰던 신준민(53·사진)씨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그는 “특수부대를 제대하고 30년 이상 잠수부 일을 하면서 시신을 셀 수 없이 건졌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 현장은 이게 현실인지 헷갈릴 정도였다”고 말했다. 신씨는 군에서 4년간 북파공작원으로 복무하고 대한민국특수임무유공자회 경북지부장으로 활동 중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신씨도 그때 생각만 하면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세월호는 전남 진도군 해역에서 침몰했다. 배에 타고 있던 단원고 학생들은 경기 안산시에서 왔다. 대구·경북과는 연관성이 떨어져 보인다. 하지만 신씨를 비롯해 지원에 나섰던 이들은 모두 경북에 살고 있는 이들이었다. 세월호 참사는 특정 지역의 일로만 치부할 수 없는 문제였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당시 지원에 나섰던 특수임무유공자회 경북지부 회원들. [프리랜서 공정식]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당시 지원에 나섰던 특수임무유공자회 경북지부 회원들. [프리랜서 공정식]

특수임무유공자회 회원들은 세월호 참사 당일 경북 포항시에 있는 사무실에서 처음 소식을 들었다. 신씨는 “자원봉사를 마치고 사무실에 있는데 TV에서 세월호 참사 소식을 전했다”면서 “전원 구조라기에 신경쓰지 않고 있었는데 그게 오보였다”고 전했다. 회원들은 자발적으로 곧장 수난구조 장비를 싣고 팽목항으로 향했다. 88올림픽고속도로(현재 광주~대구고속도로)를 타고 광주광역시와 목포시를 거쳐 팽목항까지 430여㎞를 달려가니 오후 9시였다. 그렇게 사고 현장에 도착한 잠수부들은 예상과 달리 바로 투입되지 못했다. 실제 잠수가 이뤄진 것은 17일 오후 2시가 지나서였다.

이 단체 회원인 정상민(38)씨도 그 현장에 있었다. 정씨는 “처음엔 물살이 그렇게 센지 모르고 수중카메라까지 들고 들어갔다. 그런데 조금만 잠수를 하니 수경이 벗겨질 정도로 조류가 강했고 시야도 거의 확보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는 앞을 더듬으며 수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정씨도 그때를 생각하면 목이 멘다. 그는 “당시 활동했던 민간잠수부들은 대부분 트라우마를 겪었거나 겪고 있을 것”이라며 “낮에는 수색을 하고 밤에는 TV로 뉴스를 보니 잠 자는 시간만 빼고 24시간 세월호 생각만 했다. 유가족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 생각보다 도움이 못 되는 것 같아 느끼는 압박감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말했다.

지난 23일 오전 세월호는 침몰 1072일 만에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정씨는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없어 TV를 꺼버렸다. “배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을 봤습니다.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더이상 배를 보고 있기가 힘들었어요.”

정씨는 “재난은 예고하지 않고 찾아온다”면서 “평소에도 재난에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예비비를 마련해 두고 숙련된 구조인력도 최대한 많이 양성해놓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정석 기자 kim.jung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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