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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재심’ 김태윤 감독, ‘진심 어린 사과’가 중요한 이유

중앙일보

입력

‘재심’(2월 15일 개봉, 김태윤 감독)은 자백만으로 목격자가 살인범으로 뒤바뀐 ‘전북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 기사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 절대 가볍지 않은 소재에, 이미 여러 TV 시사 프로그램에서 다룬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영화의 흥행을 쉽게 예측한 이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실화에 담긴 진실과 진심의 힘 때문일까. ‘재심’은 신작들 사이에서 꾸준히 뒷심을 발휘하며 관객 238만 명(3월 13일 집계 기준)을 돌파했다. 그리고 일찌감치 손익분기점을 넘으며 중소 규모 영화 흥행의 단비가 되고 있다.

 전작 ‘또 하나의 약속’(2014)에서부터 사회적 약자를 향한 묵묵하고 따스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 김태윤(44) 감독. 그는 magazine M과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흥행으로 부실·강압 수사에 대한 경각심이 생기길 바란다”는 바람을 전했다.

김태균 영화감독 '재심' M205호 사진=정경애(STUDIO 706)

김태균 영화감독 '재심' M205호 사진=정경애(STUDIO 706)

일찌감치 손익분기점을 넘겼고, 개봉 4주차에도 여전히 뒷심을 보여 주고 있다. 

“흥행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다행이다. 1년 전만 하더라도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영화에 대한 부담, 내 전작에 대한 부담 때문에 투자와 캐스팅이 쉽지 않았다. 손익분기점을 넘었다는 건, 어려운 결정을 해 준 배우와 스태프 그리고 투자·배급사에 손해를 끼치지 않았다는 의미이지 않나. 그저 감사하다.”

재심/사진=영화사제공

재심/사진=영화사제공

영화가 실화를 뛰어넘을 순 없지 않나. 그런데도 또다시 실화영화에 마음이 동한 이유가 있다면. 

“2012년에 (2000년 발생한) 이 사건을 처음 알게 됐다. 당시 ‘또 하나의 약속’을 준비하고 있던 시기라 (이 사건을)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건의 전말을 듣다 보니 흥미롭고 마음이 가더라.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다는 건 흔한 소재다. 그것에서 끝났다면 관심을 두지 않았을 거다. 이 사건이 독특했던 건, 10년간 복역하고 나왔더니 근로복지공단에서 최군에게 구상권(타인의 채무를 갚아 준 사람이 그 타인에 대하여 갖는 반환 청구 권리)을 청구했고, 그것 때문에 빚더미에 앉게 됐다는 점이다. 피해자 유족에게 지급한 산업재해보상보험금 4000만원에 10년간 이자가 붙어 1억4000만원이 됐거든. 억울하게 옥살이하고 나왔는데 돈까지 갚으라고 하니, 최군은 삶을 거의 놔 버린 거지. 그 돈을 내지 않으려면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 내야 하는데, 그때 최군이 박준영 변호사를 만나게 됐다. 정말 극적이지 않나. 이건 책상머리에 앉아서 상상력으로만 쓸 수 있는 설정이 아니다. 그 점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재심/사진=영화사제공

재심/사진=영화사제공

박 변호사를 처음 만났을 때 어떤 이야기를 했나. 

“박 변호사가 ‘나는 남의 불행을 이용해 떠 보려고 했던 속물 변호사였다’고 하더라. 정의를 위해 싸우는 변호사라는 말보다 더 크게 와 닿았다(웃음). 당시 최군 이야기뿐 아니라 ‘전북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 치사 사건’과 ‘전남 완도 무기수 김신혜 사건’ 등 박 변호사가 진행 중인 여러 재심 사건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재심은 어려운 청구 아닌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캐릭터가 좋았다.”

재심/사진=영화사제공

재심/사진=영화사제공

이 영화 촬영이 시작되면서 실제로 재심 결정이 났다. 

“사실 재심이 결정되기 전까지 걱정이 많았다. ‘만에 하나 재심이 이뤄지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 때문에 시나리오를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고민이 많았거든. 그런데 박 변호사가 ‘재심 청구를 받아 줬다는 건 재심이 가능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더라. 그래서 재심이 이뤄지는 엔딩으로 만들었다.”

재심에서 무죄 판결이 나던 날 기억나나. 

“그날 박 변호사, 최군과 함께 법원에 갔었다. 박 변호사는 무죄 확정 판결이 나올 거라 확신했고, 최군은 많이 울었다. 무죄 판결 받고 30분 정도 화장실에서 나오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최군의 억울함이 풀렸다는 점이 기뻤고, 영화 엔딩을 수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심했다.”

재심/사진=영화사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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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시사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1992~, SBS)에 약촌오거리 택시 기사 살인 사건이 소개되기 전, 영화가 먼저 기획됐다고 들었다. 

“많은 분이 내가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본 후 이 영화를 기획했는 줄 알고 있더라. 하지만 그전에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고 돈벌이가 될 것 같아 만들었다는 오해를 받을 땐 속상하긴 했다.”

방송으로 인해 해당 사건이 전 국민적 관심을 받은 것이 영화에 도움되었을 것 같은데. 

“사실 도움이 안 됐다. SBS 이대욱 기자가 이 사건을 알리고 싶다며 도와 달라고 해서 시작했는데, 그 후 많은 방송에서 다뤘다. 그렇다 보니 스토리에 대한 신선도가 확 떨어졌다. 물론 사건이 유명해지는 건 박 변호사나 이 기자에게 좋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만드는 입장에선 당황스럽더라. 그래도 영화화된다는 이야기가 법원과 경찰에 압박을 조금이나마 줬다고 하니, 한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변호사가 주인공이고, 재심을 다루는 이야기라 법정영화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준영(정우)과 조현우(강하늘)의 여정을 담담하게 그린 휴먼 드라마로 풀어냈다. 

“‘재심’을 법정영화로 오해한 분들이 많더라. 그런데 이 사건은 법정 공방이 전혀 없었고, 법원에 서류를 제출하고 끝났다. ‘변호인’(2013, 양우석 감독)의 경우 워낙 유명한 재판 과정과 법정 공방이 있었기에, 유명한 엔딩신을 만들 수 있었던 거다. ‘재심’을 법정영화로 풀려 한다면, 억지로 이야기를 지어내 시나리오를 만들어야 했다. 박 변호사는 해당 사건 조서만 봐도 ‘이것은 엉터리’라는 걸 딱 알 수 있었다고 하더라. 누구의 목숨이 달린 사건은 아니니, 휴먼 드라마로 푸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재심/사진=영화사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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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는 ‘진심 어린 사과’다. 

“최군과 박 변호사 모두 보상보다 진심 어린 사과를 받길 원했다. 그것에 착안한 거다. 사과하지 않는 사법부를 대표하는 인물을 시나리오 쓸 때부터 만들고, 그가 점점 상대방에 동화돼 자신을 내려놓고 진심 어린 사과를 하는 그림을 만들었다. 이 영화의 키워드가 ‘진심 어린 사과’라 지금 시기와 잘 어울린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요즘은 뭘 찍어도 그렇지 않을까(웃음).”

실화를 다루다 보면 극영화와 달리 고려해야 할 부분이 많지 않나. 

“영화가 만들어진 후, 모티브가 된 실제 인물들에게 좋지 않은 이미지가 생기거나 피해가 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래서 그들이 피해 입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실제 사건을 다루기에 왜곡 혹은 미화시키거나, 빠지는 부분이 없게끔 노력했다. 또한 영화가 개봉된 이후 박 변호사가 재심 사건을 맡는 데 힘이 되고, 최군의 억울한 응어리가 조금이라도 풀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목적이 조금은 이뤄지지 않았나 싶다.”

최군은 이 영화를 봤나. 

“가족과 함께 봤는데,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어머니도 최군도 우느라 제대로 보진 못했다고 하더라. 마음이 진정된 다음에 몇 번 더 보겠다고 연락 왔다.”

강압적으로 거짓 진술을 받아 낸 사건이기에 폭력을 보여 주는 장면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걸 보여 주는 방식이 너무 폭력적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사실 고문 장면의 수위가 높다거나 불편할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실제로 최군이 당한 고문과 강압 수사가 악랄하기 그지없었고, 나로선 그걸 반의반도 표현하지 못해 안타깝다는 생각이 더 강했거든. 최군이 모텔에 끌려가 폭행당한 건 사실이다. 담당 형사는 그를 몇 날 며칠씩 고문했고, 밖에 최군의 어머니가 계시는데도 그에게 주먹을 휘둘렀다고 하더라. 이런 장면을 모두 넣고 싶었는데, 작위적이라는 말을 들을까 봐 삭제한 부분도 있다.”

강압 수사를 한 백철기(한재영) 형사가 체포되는 미공개 영상이 공개됐다. ‘사이다’ 장면인데, 영화에서 삭제한 이유가 있나. 

“그 장면을 DVD 부가 영상에 넣으면서 배우들과 함께 봤는데, 다들 넣지 않길 잘했다고 하더라. 시나리오에서부터 고민이 많았던 장면이라 일단 찍어 놓긴 했다. 그런데 이 장면이 들어가니 엔딩의 여운이 사라져 버리더라.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지점에서 볼 때 넣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전체적인 완성도나 영화의 취지에 맞지 않아 최종적으로 뺐다.”

재심/사진=영화사제공

재심/사진=영화사제공

영화가 주는 감흥과 의미가 쭉 이어지는 게 중요할 것 같다. 

“지금도 사회에서 소외되고, 억울한 일을 당한 분들이 많다. 우리 영화가 그들에 대한 작은 관심을 끌게 만드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차기작은. 

“지금 나의 최대 관심사다. 아직 정해진 건 없다. 여러 가지를 살펴보는 중이다.”

이지영 기자 lee.jiyoung2@joongang.co.kr 사진=정경애(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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