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안내 표지, 큰 숫자 … “치매 노인들 집 찾기 쉬워졌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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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서울 노원구 SH공릉 1단지 아파트의 한 주민이 ‘치매도움 디자인’의 일환으로 보행로에 그려진 선을 따라 걷고 있다. 아파트 앞 바닥에는 동 번호가 적혀있다. [임현동 기자]

서울 노원구 SH공릉 1단지 아파트의 한 주민이 ‘치매도움 디자인’의 일환으로 보행로에 그려진 선을 따라 걷고 있다. 아파트 앞 바닥에는 동 번호가 적혀있다. [임현동 기자]

서울 노원구의 SH공릉 1단지 아파트(1395 가구)에는 입구에서부터 보행로 한 가운데에 폭 20㎝ 가량의 연두색 선이 길을 따라 그려져 있다. 또 갈림길마다 밤에도 환하게 불이 들어오는 1.8m 높이의 동(棟)안내 표지판이 설치돼 있다. 연두색 선을 따라 각 동 출입구로 가면 바닥에 쓰여 있는 동 번호를 볼 수 있다. 현관문 옆 벽면에도 동 번호가 1.5m 크기로 적혀 있다.

‘치매 도움 디자인 아파트’ 가보니 #길에 이동선 그리고 갈림길 동 표시 #엘리베이터 짝?홀수 층 컬러로 구분 #실내선 손잡이·스위치에 큰 글씨 써 #주민 76% “헤매는 일 줄어서 만족”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니 짝·홀수 층 전용으로 나뉘어져 있는 엘리베이터 두 기 옆에 오렌지색과 연두색으로 이용 가능 층수를 표기해 놓은 표지판이 보였다. 오렌지색은 짝수층 엘리베이터용, 연두색은 홀수층용이다. 눈이 침침한 노인도 쉽게 볼 수 있도록 숫자도 큼지막히 디자인했다.

단지내 일부 가구에는 이런 디자인이 집 안에도 적용됐다. 출입문과 화장실 주변 벽에는 허리 높이의 노란색 안전 손잡이가 달려 있고, 조명 스위치에는 ‘주방’, ‘화장실’ 등의 글씨가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주방 싱크대에는 유리문이 있어 안에 든 식기가 무엇인지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아파트 출입구 벽에 적힌 동 이름. [사진 임현동 기자]

아파트 출입구 벽에 적힌 동 이름. [사진 임현동 기자]

이 단지는 지난해 서울시가 정한 ‘치매도움(인지건강) 디자인’ 적용 단지다. 서울시에서 세 번째다. 치매도움(인지건강) 디자인이란 자신이 사는 동·층을 찾기 어려워하는 등 일상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경도 인지 장애(치매 전 단계)나 초기 치매 환자를 포함한 65세 이상 치매 고위험군을 위해 고안된 디자인을 말한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5년 현재 한국 65세 이상 노인 중 9.8%가 치매를 앓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노인 열 명 중 한 명이 치매를 앓고 있다는 의미다. 2050년에는 이 비율이 15.1%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서울시는 2014년부터 양천구 신월1동 다가구주택가나 영등포구 신길4동 아파트 등 총 3곳에 예산 각기 2억~4억을 들여 ‘치매도움 디자인’을 도입했다. 디자인 효과에 대해 주민들도 만족하고 있다. 해당 단지 내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75.9%가 “길을 잘 찾게 됐다”며 만족감을 표했다. 정지향 이대목동병원 신경과 교수는 “이런 디자인이 노인들의 뇌에 자극을 줘 지남력(시공간판단능력) 증진에 도움을 준다. 길 찾기 능력을 키우고 치매 예방 효과도 있다”고 말했다.

치매도움 디자인은 외국에서는 활발히 연구·적용되고 있는 분야다. 네덜란드 ‘호그벡 마을’이 대표적이다. 주택 23곳에 노인 150여 명이 살고 있는 이 마을은 치매 노인들이 생활하기 편하도록 동네 전체에 다양한 디자인을 입혔다. 여기선 마트 직원, 경비원 등으로 변장한 의료진 400여 명이 환자 상태를 수시로 확인한다.

영국은 1990년에 스털링대 내에 치매서비스개발센터(DSDC)를 만들어 치매 친화 디자인을 연구하고 있다. 호주에서도 2년 전부터 치매자립환경프로젝트(DEEP)를 진행해 치매 관리 디자인을 보급하고 있다.

이에 비해 국내 치매도움 디자인 보급은 걸음마 수준이다. 변태순 서울시 디자인정책과장은 “치매 환자가 있는 가정을 위해 실내 디자인에 적용할 팁을 담은 『인지건강 주거환경 가이드북』을 지난해에 만들어 서울과 대전·창원시 등에 5000여 권을 전달했다”며 “이 달부터 송파구 마천동 저층 주거지에 네 번째 디자인 사업을 하는 등 치매도움 디자인 적용 지역을 늘려가겠다”고 말했다.

글=조한대 기자 cho.handae@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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