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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태극기 가건물 위에서만 펄럭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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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대한민국의 태극기는 촛불의 대열 앞에서 펄럭이지 못하는가. 광복 칠십여 년이 지난 후에도 왜 태극기는 국민적 보편성에 도달하지 못하는가. 왜 태극기는 여전히 가건물 위에서만 펄럭이는가. 이 질문 속에서 대한민국의 이카로스는 날개를 퍼덕이고 있다."

소설가 김훈이 7일 출간된 문예지 문학동네 봄호에 발표한 글의 마지막 대목이다. 김씨는 '태극기에 대한 나의 요즘 생각'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10대 소년 시절 목격한 4·19의 태극기부터 촛불 시위와 맞서는 요즘 태극기까지, 태극기에 대한 자신의 인식 변화상을 소상하게 밝혔다.

김씨는 대형 태극기를 펼쳐 들고 거리를 행진하다 유혈 진압된 4·19의 태극기에서 순결함, 강렬한 지향성의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했다. 국가폭력에 대한 공포감이 태극기를 향한 순수한 복받침을 자신의 내부에서 일게 했는데, 그것이 돌이켜보면 세계에 대한 최초의 인식, 소년의 정치의식이었다고 밝혔다.

이어지는 기억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정치적 환영·환송 퍼레이드에 동원돼 맞닥뜨린 태극기다. "태극기가 억압과 지배의 장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내 사춘기의 정치의식은 혼란스러웠다"고 했다. 김씨가 보기에, '애국'이 일상을 지배하는 강력한 생활지표로 기능하던 박정희 시절의 태극기는 기한(飢寒)과 적화(赤化)로부터 살아남으려는 절박한 생존본능으로 펄럭였다.

당시 태극기가 상징하는 '애국'은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의 애국과 또 달랐다. 애국이라는 가치는 "정치권력의 압제와 비리를 정당화하는 당파성으로 변질돼 후세로 전승"됐다. 권력은 애국의 깃발 밑으로 결집돼 억압을 형성했다. 그 결과 태극기의 보편성이 훼손됐다고 김씨는 주장했다. 애국이 생업인 세력이 등장해 일상의 자유를 억압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고귀함을 역설했다고 했다.

김씨는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고대국가 이사금(尼師今)의 치정통치에 머물러 있었고 이사금과 지근거리에 있는 권신(權臣)들이 거기에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부패와 권력 남용의 뿌리는 심원했고, 범위는 방대했고, 디테일은 주밀했는데, 그 기법은 구전설화적이었다"고 썼다.하지만 그에 분노한 광화문 촛불 대열에 맞서, 그로부터 멀지 않은 거리에서 대통령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대형 태극기를 펼치고 대형 십자가를 짊어지고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절규했다. 중고등학생 시절 김씨 자신이 언 도시락을 까먹으며 박정희 대통령 행차를 향해 태극기를 흔들던 그 자리에서 '애국단체'가 태극기를 흔들며 집결했다.

김씨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의 고귀함이 '탄핵 반대'라는 정치 슬로건으로 바뀌어서 정치정서를 집결시키고, 그것이 다시 '애국'의 태극기를 펄럭이게 되는 과정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 다중의 태극기가 광장에서 펄럭이면, 그 뒤를 대형 성조기가 따라오고, 대형 십자가가 등장하는 패턴은 내 소년 시절의 '애국'의 전개과정과 흡사했다"고 썼다.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태극기를 흔드는 애국단체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를 스스로 물었다. 그 질문은 난해했다. 한 시대가 가건물로 붕괴되는 듯싶었다"고 했다.

김씨의 글은 '촛불과 태극기'라는 봄호 특집의 한 꼭지다. 시인 이영광, 소설가 이기호와 김사과 등이 글을 보탰다.

한예종 전규찬 방송영상과 교수는 '게이트들의 게이트, 촛불들의 촛불, 그리고 미디어 문화정치'라는 글에서 "KBS와 MBC는 공화정을 파괴하고 헌정체제를 유린하며 사회민주화를 훼손하는 청와대 어용방송으로 전락했다"고 지적했다. 공영방송에 환멸을 느낀 시청대중이 JTBC로 눈길을 돌려 촛불들이 자연스럽게 JTBC 뉴스의 동조·지지 세력이 됐다고 진단했다.


"JTBC가 확보한 현재의 인기도는 손석희에 대한 대중의 수동적 추동이 아닌, 진실의 저널리즘에 대한 이들의 적극적인 응대"라며 JTBC는 한겨레와 함께 "진실 구속에 맞선 파르헤시아(parrhesia·용기)의 자유언론" "의제설정, 프레임 조각의 쌍끌이 역을 도맡았다"고 했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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