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은 좋지만 판을 깨선 안된다"|유세장 폭력 사태를 보는 여야의 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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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대통령선거전이 사실상 개시되면서 대권주자들의 지방 방문길에 당초 우려했던 일들이 하나 둘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20일 전북이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가칭) 창당준비위원장의 연설장에서 대학생들이 소란을 피워 연단이 무너지는 사건이 발생한데 이어 21, 22일 노태우민정당총재의 지방연설장엔 최루탄·계란세례와 행사 방해 시위가 벌어졌다.
특히 22일 하오 노총재의 이리연설회는 시위학생들이 행사장을 점거해 경찰과 학생간에 최루탄·돌멩이가 난무하는 바람에 행사자체가 사실상 무산되는 심각한 양상에까지 이르렀다.
여권일부에선 벌써부터 민주화의 상징으로 여겨온 대통령직선제에 대해 깊은 회의를 표시하는가하면 의원내각제 주창자들은 『그것 봐라』며 직선제의 폐단을 지적하고 나올 정도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기의사를 개진하고 자기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같은 의사 관철은 어디까지나 법적 테두리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사실 또한 민주주의 기초임을 간과해선 안될 것이다.
일련의 사건들은 특정 후보또는 예비후보에 대한 정치적반감, 더 나아가 깊은 적대감에서 비롯된 것이며 지역감정까지 겹쳐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광주사태의 원흉이 광주를 어떻게 오느냐』 『살인마』등 살기등등한 구호와 유인물에서 감정의 깊은 꼴을 깨닫게 된다.
민주당 김영삼총재와 김대중고문의 부산·광주대회에 각기 엄청난 인파가 모였지만 두 사람이 서로 지역을 바꿔 방문할 때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돈다. 비슷한 「봉변」이 없으리란 보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선거전에서의 지지·반대는 개인의 자유며 권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같은 의사표시는 선거운동과 투표로써 나타나야함은 자명한 일이다.
야권에서 「선거혁명」을 외치고 있는 것도 바로 그같은 차원에서 출발한 것이다.
정부·여당은 물론 야권에서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자유로운 선거유세 분위기와 요인신변안전대책을 촉구하고 무엇보다 국민 전체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지적들이다.
○…민정당측은 노태우총재의 지방방문에서 발생한 운동권의 행사방해 사태에 대해 우려했던 유세장 폭력이 좀 빨리 나타난 것으로 보고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23일 상오 정석모 사무총장 주재로 열린 긴급 당직자회의에서는 『이번 사태가 특정후보의 이미지 손상을 노린 계획적인 행동』이라며 『선거전이 본격화되고 지역감정까지 겹치면 훨씬 더 대형화·조직화·노골화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의견이 많았다.
이에 따라 민정당은 선거의 공정성과 함께 유세장 폭력, 후보신변안전 문제는 극복해야 할 최대의 과제라고 결론짓고 우선 정부측에 행사장의 질서 유지와 안전 점검및 재발 방지책을 촉구키로 결정했다.
그러나 국민투표도 끝나기 전에 이 문제를 정치 쟁점화하면 집권당이 너무 민감히 대응한다는 인상을 주어 자칫 피해의식의 과대표출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민정당의 입장 강조보다 국민적 공감대 형성과 일종의 공명선거 캠페인으로 끌어갈 생각이다.
민정당은 양김씨가 상대방 출신지역에서 집회를 가질 때 이문제의 심각성을 직접 느낄 것이며 그때 쯤해서 여야 모두가 공동대처의 필요성을 자연스럽게 제기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보고 이 단계에서의 대야정치공세는 자제하려는 태도다.
정총장은 『직선제에서 가장 우려했던 지역감정과 유세장 불상사가 벌써부터 현실문제로 다가선 만큼 이제 이 체제를 지키고 민주주의를 신장하려면 여야정파나 개인적인 이해를 떠나 공동의 인식을 가져야할 때』라고 강조했다.
또 강경식 정책조정실장은 『우리로서는 아웅산까지 쫓아와 국가원수에게 테러를 가하려 하고 많은 요인을 살상한 북한이라는 존재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며 『유세가 본격화하면 수십만명이 모이는 장소에서 여러 가지 위험으로부터 후보를 보호하는 것이 사실상 어렵다는 점에서 이번 사태는 전국민이 경각심을 갖고 대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은 이번 이리·정주사태등에 대해 공식적인 당입장표명을 유보하고 있으나 『폭력만은 어떤 경우에도 안된다』는 데는 입을 모으고 있다.
김대중고문은 이례적으로 논평을 발표, 『폭력은 어느 쪽에서 했든 정당화될 수 없다』 고 명백히 하고 선거를 원치 않는 세력에 악용될 가능성을 우려했다.
민주당인사들은 이같은 사태가 빚어지고 있는 근본원인이 노총재가 6·29선언에서 밝힌 민주화조치를 제대로 실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책임을 민정당쪽에 돌리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영·호남으로 갈라선 현재의 당분위기로 보아 이런 사태가 자신들에게도 곧 닥칠지 모른다는 우려가 팽배해 있다.
김영삼총재 측근은 『노총재가 「6·29」선언만 했지 언론자유·구속자 석방등 후속조치를전혀 취하지 않은데서 빚어진 항의사태』라고 성격을 규정하고 『폭력은 반대하나 민주화조치만 성실히 취하면 학생들도 선거운동을 방해하지 않을것』이라며 민주화조치를 촉구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의원들은 양김이 동시에 출마하면 필연적으로 지역감정이 첨예하게 대립될 것이고 그럴 경우 노총재가 당한 봉변을 양김이 상대지역에서 당할 소지가 높아지고 있음을 걱정하고 있다.
박찬종 정책심의회의장은 『양김씨에 대해 상대지역에서 거부하는 상징적 행동만 발생해도 사태가 곧 비화되어 선거운동자체를 위협하게 될 것』이라며 선거운동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원만한 선거가 치러질지를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김현규총무등 상도계의원들은 사태를 좀 더 두고보자는 입강이다.
김총무는 『폭력은 배격해야하나 그 지역주민 감정으로 볼 때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본다』고 말하고 『지금 같은 상황을 보고 선거가 치러지기 어렵다는 등의 판단을 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태도표명을 유보하고 있다. <허남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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