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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숫자에 묻힌 광장 … “시민 껴안을 시스템 만들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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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광장 그 후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나 봄을 알린다는 경칩(5일)을 앞두고 있었지만 광장에 모인 이들은 “아직 봄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 주최로 지난 4일 열린 19차 촛불집회의 주제는 ‘박근혜 없는 3월, 그래야 봄이다’였다. 퇴진행동은 “압도적인 탄핵 찬성과 박근혜 처벌을 향한 뜨거운 민심을 결집하자”고 주장했다. 이날 집회 참가자들은 시종일관 국정 농단을 규탄하며 “박근혜 퇴진”과 “탄핵 인용”을 외쳤다.

‘모이고 외치고 행진’ 도돌이표 #광장에 대한 인식도 갈수록 악화 #“누가 대통령 되든 집회 계속될 것 #문제 제기 넘어 구체적 해법 고민을”

광장의 목소리는 지난해 12월 국회의 박 대통령 탄핵안 의결 등 ‘최순실 사태’의 여러 국면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제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최항섭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는 “세 불리기와 양적 과시에 치중해 온 측면이 있다. 이제는 ‘광장 그 후’를 고민해야 할 때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찬성하는 ‘촛불집회’와 반대하는 ‘태극기집회’가 지난 4일 서울 세종로 일대에서 열렸다. 사진은 이날 횃불을 들고 광화문광장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 [사진 김상선·김성룡 기자]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찬성하는 ‘촛불집회’와 반대하는 ‘태극기집회’가 지난 4일 서울 세종로 일대에서 열렸다. 사진은 이날 횃불을 들고 광화문광장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 [사진 김상선·김성룡 기자]

◆집회, 기존 방식 매번 되풀이=이날 주최 측이 준비한 프로그램은 오후 5시30분 사전공연, 6시 본 집회, 7시30분 행진이었다. ‘시위대 집결→비판과 주장→청와대·헌법재판소 방면 행진’이란 기존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행정법원이 지난해 12월 24일 “헌법재판소 인근 행진을 허용하라”고 결정을 내린 뒤 되풀이돼 온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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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단에 오른 발언자들은 ‘사드 배치 무효, 국정교과서 철회’ 등을 주장했다. 발언자가 “박근혜는 퇴진하라. 황교안은 사퇴하라. 헌재는 탄핵을 인용하라. 함성 시작”이라고 외치면 집회 참여자들이 소리치는 식이었다. 연단에 선 10명의 발언을 분석해 보니 자주 언급된 단어는 박근혜(40회), 우리(29회), 국민(28회), 퇴진(23회), 탄핵(18회)이었다.

◆마이크 소리만 커져=이날 스피커를 통해 나온 연단에서의 발언은 소음측정기 기록으로 평균 95dB(데시벨)이었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 따른 최대 소음 허용치는 75dB이다. 퇴진행동은 매 집회 때마다 무대와 음향시설 설치에 8000만원 가량을 쓴다. 큰 목소리는 탄핵 반대를 외치는 태극기집회 측과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측면도 있다. ‘맞불집회’ 형태로 시작한 태극기집회의 마이크에서도 점점 더 큰 소리가 나온다. 조원진 자유한국당 의원은 서울시청 앞 광장의 연단에 올라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 촛불의 배후에는 정권을 찬탈하려는 종북좌파, 통진당 잔당, 전교조가 있다”고 외쳤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집회에 대한 인식도 부정적으로 변하고 있다.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빅데이터 분석도구인 ‘소셜 메트릭스’에 따르면 최근 한 달간 ‘집회’와 관련된 말 상위 10개 중 6개가 폭행·욕설·반대하다·폭행당하다·불법·빨갱이 등 부정적인 뉘앙스의 말이었다. 긍정적 연관어는 ‘유명하다’와 ‘평화적’ 두 개였다.

태극기를 머리에 이고 서울광장 태극기집회에 참가한 시민들. [사진 김상선·김성룡 기자]

태극기를 머리에 이고 서울광장 태극기집회에 참가한 시민들. [사진 김상선·김성룡 기자]

◆제도권 수렴 방법 찾아야=전문가들은 이제는 문제 제기를 넘어 해법을 모색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제언한다. 가상준 단국대 정치학과 교수는 “우리는 온라인 청원 제도 등 광장의 목소리를 담아낼 제도적인 해법이 없다시피 해서 다들 광장으로 나온다. 집회 참여자가 많다고 승리하는 것이 아닌데, 이런 상태라면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되든 상관없이 집회 시위가 계속될 것이다”고 말했다. 오동석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집회에서 드러나는 국민의 요구를 국회 등이 수렴하고 해소해야 하는데 현재는 사실상 모두 수수방관하는 상태다”고 지적했다.

퇴진행동 측은 참여연대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등 1503개 단체가 모여 출범했다고 말한다. 이들 단체는 그동안 사회 현안에 대한 정책 대안을 꾸준히 제시해 왔지만 이번 사태에서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광장 그 후’를 고민하는 자리도 찾기 어려웠다. 본지 리셋코리아 위원인 조희정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은 “탄핵 국면이 가라앉은 뒤 촛불이 분출한 동력을 어떻게 유지할지에 대한 관심을 더 기울여야 한다”며 “영국과 이탈리아처럼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제도권 안으로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가는 민주적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글=김민관·여성국·하준호 기자 kim.minkwan@joongang.co.kr
사진=김상선·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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