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물질 나온 콘도, 북한이 임대” 현지서 VX 제조 가능성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6면

26일 김정남 암살에 쓰인 VX 잔류 가능성에 대비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경찰 과 소방당국이 오염 제거 작업을 하고 있다. [쿠알라룸푸르=뉴시스]

26일 김정남 암살에 쓰인 VX 잔류 가능성에 대비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경찰 과 소방당국이 오염 제거 작업을 하고 있다. [쿠알라룸푸르=뉴시스]

김정남 암살에 사용된 맹독성 화학무기 VX가 북한 용의자들에 의해 말레이시아 내에서 제조됐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말레이시아 당국 "북 용의자 명의” #"김정남, 중독 20분 내 고통속 사망” #미 싱크탱크 "북, 국가 아닌 마피아 #가디언 "영국, 북한과 단교할 수도”

26일 새벽 압둘 사마흐 마트 셀랑고르주 지방경찰청장은 “지난 23일 압수수색 과정에서 다량의 화학물질이 발견된 콘도가 평양으로 도주한 4명의 북한 용의자 명의로 임대됐다”고 밝혔다. 앞서 경찰은 체포된 용의자 이정철의 집과 2㎞ 떨어진 이 콘도에서 화학물질 샘플과 장갑·신발·주사기 등을 확보해 화학청에 성분 분석을 의뢰했다.

이날 말레이시아 보건당국은 김정남 사망 원인이 VX 중독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수라마니암 사타시밤 보건부 장관은 “사망 원인은 약물 중독에 따른 심각한 마비이며 VX 중독 이후 20분 안에 아주 고통스럽게 사망했을 것”라고 말했다. 이어 “사망자에게 사용된 VX의 양이 많았던 탓에 그의 심장은 물론 폐를 포함한 모든 장기가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며 “(김정남에게) 사용된 VX의 양이 치사량(10㎎)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김정남 암살에 VX가 사용된 것이 드러나면서 국제사회는 더욱 격앙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정부에선 북한과의 단교가 공개 거론되고 있다. 나즈리 압둘 아지즈 문화관광부 장관은 25일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해도 상관없다. 북한과의 관계는 어떤 이득도 없다”고 말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VX 사용이 최종 확인될 경우 말레이시아에 이어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국가들과 영국까지 북한과 단교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미국 정부는 25일(현지시간) 김정남 암살의 배후로 북한을 지목하고 있음을 처음으로 시사했다. 게리 로스 미 국방부 대변인은 이날 중앙일보에 “북한이 엄청난 화학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살포할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라고 밝혔다. 그간 미 정부는 “우리는 수사에 관여하지 않는다”고만 말해왔다.

하지만 VX 사용이 드러나자 북한의 화학무기 보유를 공식 거론하며 김정남 암살을 북한 소행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알린 것이다. 로스 대변인은 “주한미군은 이런 위협에 대비해 잘 훈련돼 있고 장비도 잘 갖춰져 있다”고 강조했다. 전날 제프 데이비스 펜타곤 대변인은 VX를 통한 인명 살상에 대해 “실질적인 위협”이라며 “미사일 등에 탑재되면 대량살상무기가 된다”고 우려했다.

트럼프 정부의 첫번째 북·미 접촉도 VX 파문으로 무산됐다. 워싱턴포스트(WP)는 다음달 1~2일 뉴욕에서 예정됐던 북·미 회동과 관련, “국무부가 북한 외교관들의 비자 발급을 거부했다. 말레이시아 정부가 암살에 VX가 사용됐다고 밝힌 게 결정타”라고 전했다. 당초 북한의 최선희 외무성 국장 등과 미국의 로버트 갈루치 전 국무부 북핵 특사, 빅터 차 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 담당 보좌관 등이 뉴욕에서 만나려 했지만 트럼프 정부가 북측 인사들의 입국을 차단한 것이다. 일본 교도통신은 트럼프 정부가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대북 선제타격론도 다시 등장했다. 하미시 드 브레턴 고든 전 영국 대량살상무기대응부대 지휘관은 “북한이 VX 같은 무기를 사용하려는 조짐이 보이면 무력으로 대응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가디언에 밝혔다.

워싱턴의 싱크탱크인 국가이익센터(CNI) 해리 카지아니스 국장은 중앙일보에 “VX는 북한이 암살을 주도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라며 “북한은 국가라기보다는 마피아”라고 비난했다. 존 에버러드 전 평양 주재 영국 대사는 CNN 기고에서 “이슬람국가(IS) 같은 테러 집단이 부러워서 침을 흘리고 있을 것”이라며 북한 생화학무기의 국제적 확산을 우려했다.

WP는 VX와 같은 생화학무기를 통한 대규모 피해를 우려하는 ‘최악 시나리오’ 기사에서 “(김정남 피습 당시) 주변의 공항 이용객들이 치명적인 독성물질에 90m 이내로 접근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여성 용의자가 (공항) 어디선가 어떤 식으로건 VX를 노출시켰을 수 있다”는 전문가 주장도 실었다.

워싱턴·런던·쿠알라룸푸르=채병건·김성탁·신경진 특파원 mfemc@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