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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버려야 새 것을 얻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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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호 면

이사철이 돌아왔나 보다. 도반 절로 향하는 길에 키 큰 사다리차, 이삿짐 차를 두 번이나 만났다. 절에 도착하니 동안거(겨울 수행)를 마치고 돌아온 스님들이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또 최근에는 한 지인에게서 이사를 하게 됐다는 소식도 들었다. 짐 정리할 게 많더라는 걱정과 함께다. 특히 자신에게 만화책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며 재밌는 얘길 꺼냈다. 가장 아끼는 물건이 싱글의 삶을 외롭지 않게 해준 만화책이라며 꽃처럼 맑게 웃었다. 그런데 그 소중한 책을 기어이 버리겠단다. 나도 모르게 아깝다는 생각이 얼핏 스쳤다.


눈치를 챈 것인지 엊그제 작은 선물이 하나 왔다. 열어보니 만화책이다. 외로운 스님에게 전하는 기념품이란다. 아끼는 물건을 그냥 버리기는 아깝고 해서 주위에 나누는 것으로 비움을 대신했나 보다. 뜻밖의 선물에 미소 가득한 얼굴이 되고 보니, 슬그머니 나도 봄맞이 정리 좀 해야겠다 싶었다.

그렇게 정리를 해보니 불필요한 책에서부터 그만 입어도 될 법한 옷가지들까지-. 비우고 버릴 것들이 꽤 나왔다. 일단 버릴 것들을 분류해서 한쪽에 모았다. 다음은 내놓기만 하면 끝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묶인 책을 드는 순간 다시 살펴보고 싶어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결국 쓰레기 뭉치를 풀고는 ‘이건 추억 있는 물건인데- 저건 또 볼 책인데-’ 하나둘 제자리로 돌아가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문득 ‘버리는 게 참 쉽지 않구나. 출가자인 나도 이럴진대 일반인들은 얼마나 어려울까?’ 더욱이 요즘 세태와 맞물려 욕망에 대해 들여다보게 됐다. 인간의 근본 욕망에는 재(財)·색(色)·식(食)·명예(名譽)·수면(睡眠)이 있다. 그 가운데 어떤 이는 명예를 버리기가 가장 어렵다 하고, 어떤 이는 색욕을 끊기가 가장 어렵다 한다.

오히려 재물에 대한 욕심은 다른 욕망들에 비하면 비교적 다스리기 쉬운 편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을 보면 분명 사람 나름인 듯하다. 대다수가 재물을 탐하다가 생긴 문제들이니까.

법정스님은 『무소유』에서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뜬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고 많은 물량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사실 욕심이 아무리 많아도 우리는 알고 있다. 손도 펴야 뭔가를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버려야 새 것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그간 권력의 기반이 되었던 낡은 것들을 버려야만 새천년을 열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낡은 패러다임과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구체제)을 벗어나 새로운 자유체제로 넘어갈 수 있을까?

정초만 해도 하고 싶은 일, 갖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맘이 좀 바뀌었다. 이것도 비우고, 저것도 좀 버려야겠다. 비우고 버린 뒤에는 더 아름다운 것들로 충만하리라 믿으며.

원영 스님
조계종에서 불교연구·교육을 담당하는 교육아사리. 저서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인 것들』.BBS 라디오 ‘좋은 아침,원영입니다’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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