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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잠'을 더럽힌(?) 블랙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19호 29면

‘여성 혐오’에서 ‘표현의 자유’까지 다양한 논란을 부채질한 박근혜 대통령 풍자화 ‘더러운 잠’ 사태가 아직도 진행중이다. 지난주 광화문 광장에서 ‘창작표현의 자유 수호와 ‘더러운 잠’ 작품 훼손에 대한 예술인 기자회견’이 열렸고, 이구영 작가는 곧바로 후속작 ‘블랙’을 내놨다.

[CULTURE TALK] #풍자 누드화의 미학

작품 훼손 사태가 없었다면 합성과 편집의 시대에 ‘더러운 잠’은 피식 웃고 넘겼을 법한 그림이다. 조악한 드로잉은 인터넷과 SNS에 떠도는 흔한 패러디 포스터 수준. 간단히 사람의 얼굴을 합성해 그럴듯한 가짜 사진을 생산하는 스마트폰 유행 어플의 실력이 더 나아보인다. 원본 없는 복제가 대세가 된 시뮬라크르의 시대에 이런 류의 이미지는 딱히 놀라울 것도 없다. 미국에서는 이미 2004년 ‘올랭피아’ 대신 조지 부시를 나체로 등장시킨 ‘조지 왕의 휴식’이 나왔고, 지난해 대선 당시 힐러리 클린턴을 성적으로 패러디한 이미지도 쏟아졌지만 별다른 논쟁거리도 되지 못했다.

‘여혐’이라는 독특한 프레임이 한창인 한국에서만 젠더의 문제로 확대됐다. “표현의 자유”를 외치는 예술가들에게 페미니스트들은 “혐오는 풍자가 아니”라고 받아친다. 미학적으로도 비판 일색이다. 일견 마네의 ‘올랭피아’(1863) 풍자로 보이지만 ‘올랭피아’가 극복 대상으로 삼은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1510)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까지 무차별 차용한 1차원적 도상 짜깁기가 ‘올랭피아’의 위대한 혁명성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논란 때문에 곰곰이 들여다보니 좀 다르게 보였다. ‘올랭피아’의 신체를 ‘잠자는 비너스’의 신체로 바꾼 그 지점에 위트가 번득이고 있었다. ‘잠자는 비너스’가 누군가. 미술사에서 그려진 최초의 누워 있는 여체로, 이상적인 여성 누드의 화신이다. 그리스 조각에서 신과 영웅을 이상적으로 표현하는 남성 신체에 비해 하등한 것으로 치부되던 여성 신체가 비너스라는 여신의 이미지를 입고 경외의 대상으로 격상된 것이다. 이후 여성 누드는 에로티시즘과 분리된 신성한 지위를 부여받았고, ‘잠자는 비너스’는 이상적인 누드에서 최상의 미를 추구했던 전근대 예술의 상징이 됐다.

19세기 들어 이런 누드는 사라졌다. 사진이 사실적인 회화양식을 대체하면서 예술가는 더 이상 완벽한 아름다움이 아닌 혁신적인 사고의 전환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수줍은 여신 대신 매춘부가 똑바로 관객을 응시하는 ‘올랭피아’는 나체의 수치심을 딛고 매춘사업이라는 사회의 음부를 드러냄으로써 현대성의 상징이 됐다. 누드로 미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누드에 당대의 문제를 투영하면서 현대 예술을 열어젖힌 것이다.

그럼 미술사를 거슬러 굳이 비너스의 몸을 빌어온 ‘잠자는 대통령’은 어떤 문제를 투영하고 있을까. 비너스의 젊고 이상적인 육체는 최순실을 닮은 하녀가 한아름 안고 있는 주사기로 만들어낸 영원한 젊음의 시뮬라크르에 다름아니다. ‘잠자는 비너스’처럼 경외의 대상일 수도 있었던 최초의 여성 대통령은 스스로를 신격화하다 매춘부에 비유되는 신세로 추락하고 말았다. 혹시 ‘더러운 잠’의 도상 뒤섞기는 당당하고 주체적인 올랭피아가 되지 못하고 스스로 응시의 대상이 되고자 시대착오적인 비너스의 미를 좇다가 초래된 아이러니에 대한 고도의 패러디가 아닐까.

그런데 후속작을 보고 확 깨고 말았다. 작가는 ‘더러운 잠’의 핵심인 누드 부분을 검게 지우고 제목까지 ‘블랙’이라 붙였다. “블랙리스트에 대한 저항의 의미”와 “여성혐오 논란에 대한 항의표시”라는 친절한 설명도 곁들였다. 대신 닭과 오리떼가 추가됐다. 대통령에 대한 인격적 조롱과 AI사태까지 아우르며 그야말로 1차원적 도상짜깁기로 도배한 것이다. 내가 ‘더러운 잠’의 미학을 한참 잘못 짚은 것일까. 아니면 이 또한 ‘더러운 잠’에 대한 1차원적 해석을 패러디한 고도의 풍자일까. 오리무중이 아닐수 없다.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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