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편제' 가족은 어떻게 서로를 보듬었을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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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호 14면

얼마 전 지인의 부고를 듣고 급히 장례식장에 갔을 때, 나는 혜화동 근처의 그 병원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한때는 무척 정든 장소였지만, 그곳은 내게 오랫동안 ‘트라우마’였다. 10여 년 전 그곳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무척 견디기 힘든 시간을 겪었고, 그래서 오랫동안 그곳에 가는 것을 꺼렸다. 어쩌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거나 약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곳에 들러야 할 때마다 ‘그때 그 시절’의 트라우마가 독감 바이러스처럼 다시 온몸으로 퍼지는 느낌에 시달렸다.

정여울의 심리학으로 읽는 문학 #이청준의 『선학동 나그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나는 처음으로 그곳이 내게 뼈아픈 장소였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잊었다. 처음으로 그곳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내 무의식의 역사 속에서는 무척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전까지 그곳은 그저 아픈 곳, 옛 상처를 건드리는 곳, 회피하고 싶은 곳, 심지어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성’조차 마비시키는 곳이었다. 방어기제를 강하게 작동시켜야 간신히 고통을 잠재울 수 있던 그곳이, 이제는 ‘아프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장소가 되었다. 그 장소가 지닌 본연의 아름다움을 비로소 깨닫게 된 순간, 나는 내 지난날의 상처가 극복되었음을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상처란 이렇다. 극복하려고 애쓸 때는 꿈쩍도 안 하다가, 때로는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스르르 극복된다. 물론 죽 떠낸 자리처럼 완전히 말끔 하지는 않지만. 최근까지도 그 10여 년 전의 트라우마를 영원히 극복하지 못할 거라고 최근까지도 생각했었다. 내가 행복해질 수 없는 건 다 그때 그 시절의 상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의식의 판단’이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그 아픔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만나기 싫다'는 생각에는 이제 시달리지 않게 됐다. 그것은 ‘무의식의 힘’ 아니었을까. 내 의식은 내가 상처를 극복할 수 없으므로 행복해질 수 없다고 판단했지만, 나의 무의식은 ‘너는 네 상처보다 훨씬 강한 존재야’라고 수없이 속삭여 왔던 것은 아닐까.

사회적 통념이나 오랜 생활습관에 절어 있는 ‘의식’은 그동안의 관성대로 고집을 부리지만, ‘무의식’은 아무리 감시를 강화해도 끝내 탈옥에 성공하는 불굴의 죄수처럼 의식의 보호관찰을 거부한다. 이렇듯 의식의 통제와 무의식의 자유로운 움직임은 필연적으로 어긋나게 되는데, 우리가 의식의 통제를 강화할수록 그 의식의 압제로부터 벗어나려는 무의식의 꿈틀거림은 더욱 강렬하고 복잡해지는 경향이 있다.

심리학의 눈으로 문학을 바라보는 훈련을 통해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상처와 천천히 작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이토록 심리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도, 그 첫 번째 동기는 ‘내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서’였으니 말이다. 예전에는 그저 ‘아름다운 작품’이라고만 생각했던 소설이, 심리학의 눈으로 보면 ‘우리의 무의식을 이해하는 데 특별한 관점을 제공하는 작품’이 된다.

영화 ‘서편제’

영화 ‘서편제’

주막 주인이 들려준 눈먼 누이 이야기

소설 『선학동 나그네』가 바로 그런 경우다. 요새 나는 이야기 속 해피엔딩이 꼭 심리적 건강에 좋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 소설이야말로 ‘해피엔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트라우마의 치유에 도움이 되는 작품’임을 깨달았다. 『선학동 나그네』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로도 잘 알려진 소리꾼 가족의 후일담이라 할 수 있다.

이청준의 남도 이야기 연작 속에서 ‘아버지’는 트라우마의 뿌리이자 원흉이다. 진정한 소리꾼으로 만든답시고 열 살짜리 딸에게 청강수를 먹여 눈을 멀게 했을 뿐 아니라, ‘소리꾼 남매’를 키운다는 명목으로 의붓아들의 가슴에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아버지. 『선학동 나그네』는 그 상처의 원흉 아버지가 죽고 난 뒤, 소리꾼 누이의 흔적을 찾는 오라비의 이야기다.

오라비는 누이가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학동 주막에 들러 주인에게 ‘소리꾼 부녀’의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주인은 이 갑작스러운 손님에게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럽게, 마치 오래전에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자신 곁에 머물다 간 소리꾼 여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손님은 자신이 그 눈 먼 소리꾼 여인의 오라비임을 애써 숨기려 하지만, 주인은 그가 나타난 순간 마치 오래된 예언이 실현되듯 그에게 모든 사연을 들려준다.

어찌 보면, 이 이야기는 너무도 비극적이다. 눈으로 뻗칠 영기를 귀와 목청으로 옮기게 하여 소리를 비상하게 한다는 설을 믿었던 아버지, 아들로부터 어머니의 사랑을 영원히 빼앗아 간 의붓아비에게 살의를 느끼는 아들, 그 아비를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보살펴 주며 평생 ‘소리꾼 부녀’의 인생을 살아간 것으로도 모자라 천하의 명당이라는 선학동에 아비를 몰래 묻어 주고 삼년상까지 치러 준 딸.

의붓아들은 오랜 한을 풀기 위해 선학동으로 왔지만, 끝내 누이를 만나지 못한다. 누구도 소망을 충족하지 못한 것만 같다. 하지만 『선학동 나그네』를 다 읽고 나면, 내 마음 한구석의 가파르게 모서리 진 슬픔이 치유되는 느낌이 든다. 그것은 누구도 해피엔딩을 맞이하지 못했지만, 모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정신의 자유를 얻었기 때문 아닐까.

아버지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지만 결국 훌륭한 소리꾼 남매를 키워 냈고, 딸은 자신의 눈을 멀게 한 아비를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따스하게 감싸 주었으며,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극복한 아들은 누이의 소리를 그리워하며 누이가 그 아름다운 소리를 통해 선학동 사람들의 닫힌 마음을 열어 주고 저마다의 한 맺힌 가슴을 치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행복 향한 집착을 버려야 행복

이 이야기는 분명 새드엔딩(sad ending)으로 나아가지만, 그 이야기를 읽는 동안 우리의 상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치유된다. 두 의붓 남매는 핏줄이 아니라 ‘소리의 정한(情恨)’으로 얽혀 있는 사이였으며, 그들 사이에서 남도의 소리는 치유의 매개가 된다. 굳이 서로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확인하지 않고도, 그들은 주막 주인의 이야기를 통해 해묵은 상처를 치유하고 ‘나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아버지’라는 트라우마, 그 몹쓸 운명의 사슬로부터 진정으로 해방된 것이다.

치유는 행복한 상태로 곧바로

나아가는 것이라기보다는 ‘행복을 스스로 쟁취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상태에 가깝다. 그러니까 무너진 결혼 생활을 억지로 재건하기 위해 싫어도 꾹 참고 사는 것이 치유가 아니라, ‘그가 없이도 내가 홀로 설 수 있음’을 깨닫고 과감히 이별을 선택하는 것이 더욱 치유적일 수 있다. ‘행복한 사람’이 되게 만든다기보다는 ‘주체적인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정신분석의 진정한 목적이다. 사랑하지 않는데도 서로 눈치를 보며 이혼하지 않고 행복한 척하며 안정되게 살아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별을 선택하더라도 자기 인생의 진정한 주체가 되어 용감하게 살게 만들어 주는 것이 정신분석의 힘이다.

지금 당장 행복해지지 않아도 좋다. 행복도 불행도, 우울도 불안도, 그 자체로 견디고 묵상할 수 있는 용기야말로 치유의 징후다. 진정한 치유란, 급작스러운 해피엔딩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향한 오랜 집착으로부터도 해방되는 것이니까.

 정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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